순국스크랩 [2023/01]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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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간담 서늘케 한 신출귀몰한 ‘범인’
1천 명 군경과 대적해 16명 사살
마지막 한 발로 스스로 목숨 끊어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일제 경찰은 김상옥이라 하면 그의 신출귀몰함에 공포감을 느꼈다. 이번에는 1천 명의 군경을 동원하여 새벽 어둠 속에서 효제동 이혜수 집 주변을 4중으로 포위했다. 그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공격을 개시했다. 김상옥 의사는 주변 집 담을 타고 넘나들면서 혼자 몸으로 쌍권총을 들고 대적하여 적 16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수많은 군경을 대적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결코 일제에 항복하거나 붙잡혀 굴욕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약속에 따라,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종로경찰서 폭파는 작은 시작에 불과
더 본격적인 거사 준비

2023년 1월 22일은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김상옥 의사는 그 열흘 전인 1월 12일 저녁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 경찰과 식민지 당국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종로경찰서는 경성이라 불렀던 서울 한복판, 종로2가 YMCA 옆에 있었다. 또한 독립운동가 탄압과 고문의 총본부였다. 그런 곳이 폭파당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 폭파는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김상옥 의사는 조선 총독을 비롯한 일제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더 본격적인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거사 후 사라진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이런 대담한 거사를 할 수 있는 인물은 김상옥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온갖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집 주변을 감시하고 정보를 캤다. 그러다 마침내 상해로 망명한 김상옥 의사가 국내로 잠입했으며, 결혼한 여동생 김아기와 매부 고봉근이 사는 삼판통(오늘날 후암동) 집에 숨어 무언가 더 큰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월 17일 눈이 하얗게 내린 새벽 어둠 속에서 21명의 민완형사가 삼판통 김상옥 의사 은신처를 에워쌌다. 유도 4단의 다무라(田村) 형사부장이 부하 3명을 이끌고 체포조로서 담을 넘어 들어가 김상옥 의사가 자고 있던 방문 앞에서 총을 겨누며 항복을 촉구했다.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김상옥 의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김상옥 의사는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오며 방문 앞에 있던 다무라 형사부장을 비롯한 4명의 형사대를 쏘고, 맨발에 벼락같이 담장을 뛰어넘어 눈깜짝하는 사이에 눈속의 남산으로 사라졌다. 담 밖의 순사대는 안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한 채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허둥지둥했다. 경성 시내에 비상이 걸리고 더 많은 병력을 풀어 남산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김상옥 의사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김상옥 의사는 남산을 가로질러 반대편 왕십리 안장사라는 절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주지 스님에게서 승복과 갓을 빌려 승려로 변장하고 짚신을 거꾸로 신고 눈덮인 남산을 걸어 내려와 유유히 잠적했다. 눈속에 난 발자국을 쫓던 일제는 결국 허탕쳤다.
김상옥 의사는 수유리를 거쳐 그가 태어나고 자란 종로 5가 근처 효제동 73번지 이혜수 동지집에 몸을 숨기고, 발의 동상을 치료하며 동지들과 연락을 취했다.
효제동 급습한 적 16명 사살하고
마지막 한 발로 스스로 목숨 끊어
일제 경찰은 김상옥이라 하면 그의 신출귀몰함에 공포감을 느꼈다. 다시 동지를 붙잡아 고문하여 김상옥 의사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이번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1천 명의 군경을 동원하여 새벽 어둠 속에서 효제동 이혜수 집 주변을 4중으로 포위했다. 그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공격을 개시했다. 김상옥 의사는 주변 집 담을 타고 넘나들면서 혼자 몸으로 쌍권총을 들고 대적하여 적 16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수많은 군경을 대적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탄환이 다 되어 갔다.

김상옥 의사는 상해에서 국내로 잠입할 때,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될 결심을 했다. 김상옥 의사는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결코 일제에 항복하거나 붙잡혀 굴욕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약속에 따라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제 순사대는 김상옥 의사라 하면 오금이 저려 아무도 그 죽음을 확인하러 나서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를 불러와 의사의 죽음을 확인하게 했다.
조선총독부 당국은 김상옥 의사의 신출귀몰한 투쟁과 장렬한 최후가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돋구어 다시 3·1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반일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한 달 20일 동안 보도를 금지했다. 50일이 지나, 김상옥 의사 활약과 장렬한 죽음에 대한 관심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려 보도금지를 해제하자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양면에 걸쳐 전면 호외를 발행하여 김상옥 의사의 담대한 활약과 장렬한 죽음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번창하는 영덕철물점 사업가 되어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 실천
3·1운동의 거대한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원하는 독립이 오지 못하고 식민지 암담한 현실이 지속되자 실의에 빠져 있던 우리 민족은 김상옥 의사로 인해 “우리 민족은 아직 살아있다.” “우리는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런 영향으로 3년 뒤 6·10 만세운동(1926), 그 후 다시 3년 뒤 광주학생운동(1929) 등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김상옥 의사는 가난한 노동자 출신이었다. 서당도 다니지 못하고 8살부터 노동 현장에 나서 가족 생계를 도와야 했다. 퇴직 하급 군출신 아버지가 하는 체 즉, 얼개미 만드는 쳇불제작소에서 일을 했다. 그 일은 가족이 다 달라붙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해도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김상옥 의사와 형 춘옥, 동생 춘원 3형제는 더 나은 벌이를 위해 김상옥 의사 12살 때부터 대장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 앞에서 무거운 망치로 쇠를 다루는 대장간 일은 노동 중 가장 힘든 노동이었다. 힘든 노동 속에서 기술을 익히고 경험을 쌓아 갔다.
도중에 김상옥 의사는 잠시 기독교 전파를 위해 삼남지방을 돌며 문서전도를 하는 매서인으로 봉사했다. 이때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의약품을 가져가 팔았다. 이 일이 의외로 호응이 좋아 독립하여 철물점을 창업할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창신동 동대문 앞에 영덕철물점을 열었다. 철물점은 3형제의 노력으로 번창했다. 마침내 신설동으로 가는 신작로에 유일한 이층집을 짓고, 50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번창하는 영덕철물점 사업가가 되었다.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번창하는 사업으로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상옥 의사는 사업을 하면서도 민족을 생각했다. 일제 상품을 몰아내어 민족경제를 살리기 위해 수건, 양말을 제조했다.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게 된 우리 동포들이 머리에 모자를 써야 했는데, 신식 모자는 죄다 일제였다. 우리 머리 위에 일제 모자를 얹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김상옥 의사는 어릴 때 말총으로 체를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 말총으로 신사 모자를 만들었다. 가볍고 위생적인 말총모자는 민족의 자존심도 세워주어 불티나게 팔렸다. 이렇게 사업보국(事業報國) 즉 사업을 통해 나라를 위한다는 정신을 실천했다.
1919년 3·1운동은 김상옥 의사의 삶에서도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독립을 위해 3·1운동이 더 널리 확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김상옥 의사는 주변 청년동지들을 모아 혁신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국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파하여 계속적으로 독립운동에 산소를 불어넣는 일을 하기 위헤 「혁신공보」라는 비밀 지하신문을 등사판으로 만들어 배포하는 일을 시작했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계속 찾아간 것이었다.
동지들의 결속력과 위험을 무릅쓴 헌신으로 4월 17일 제1호를 낸 이래 1919년 말까지 처음에는 매일, 중도에 주 1회 발간을 지속했다. 일제 경찰이 의문의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8월에는 김상옥 의사에 혐의를 두고 잡아들여 40일간이나 갖은 고문을 가하며 추궁했다. 그러나 김상옥 의사의 무거운 입을 열게 하지 못했다. 기소했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방면되었다. 그럼에도 의심의 거두지 않는 일제의 추적과 자금의 한계로 더 이상 혁신공보 발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보통으로 이 정도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하며 독립운동을 접었을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기대했던 독립이 오지 못한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자 김상옥 의사는 더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 수뇌부와 친일분자를 직접 공격, 처단하여 식민지 상황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0년 1월 혁신단 동지들을 중심으로 암살단을 조직하고 사격술을 비롯한 특공훈련을 했다.
1920년 8월 24일 저녁은 결정적인 기회였다. 미국 의회 동양시찰단 일행이 중국을 거쳐 경성으로 들어오는 날이었다. 김상옥 의사는 트럭 3대, 총과 폭탄, 저격수를 준비했다. 남대문 역 미의원단 영접행사에 나오는 일제 고관과 친일 거두들을 일거에 처단하고, 거리에 늘어선 환영 인파에게 만세시위를 하도록 유도하며, 총독부 등을 폭파하는 일대 혁명을 계획했다.
8월 24일 오전까지 다른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제 한훈 동지가 지방에 숨겨놓은 총과 탄환을 가져와 그것을 받아 저격수 이운기와 서대순 동지에게 전달하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동대문경찰서 형사대가 들이닥쳤다. 형사대는 이런 엄청난 거사가 준비되고 있는지 까맣게 모른 채 위험인물 김상옥 의사를 경찰서에 가두어두었다가 행사 끝나면 풀어주는 예비검속을 위해 온 것이었다. 형사대가 들이닥친 그 시간에 김상옥 의사에게 총과 탄환을 전달하기 위해 한훈 동지가 왔다. 형사대가 한훈을 덮쳐 몸에서 권총 3자루와 실탄 300발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가택수색에 돌입했다. 김상옥 의사 사무실 비밀벽장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암살단 조직과 계획서가 발견되었다. 김상옥 의사는 체포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 거사는 실행 직전에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일제에 정면승부 걸었던 대담한 독립운동
34년 짧은 생 살면서 다방면에서 활약
이와 같이 김상옥 의사는 대담했고, 일제에 정면승부를 걸었다. 김상옥 의사는 34년의 짧은 생을 살았으나, 야학운동, 기독교 전파, 한훈 등과 박상진의 광복회 비밀독립운동, 말총모자 보급 등의 물산장려운동 선도, 3·1운동, 혁신단과 혁신공보 제작 보급, 암살단 의열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활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김상옥 의사의 활동무대는 서울과 지방, 국내와 상해 등 중국에 걸쳐 있었다. 김상옥 의사의 효제동 1:1000의 시가전을 통한 마지막 의거는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에 일대 활기와 독립에의 확신을 주어 독립운동에 국면 전환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다. 김상옥 의사를 국내에 파견한 김구 선생은 김상옥 의사 의거를 의열투쟁의 한 전형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10년 후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에 반전을 가져오기 위해 김상옥 의사의 암살단처럼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통해 일제의 핵심부를 타격하는 작전을 지도했다.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회장 윤홍근)는 순국 100주년을 맞아 1922년 12월 21일 순국 10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를 시작으로, 순국100주년 기념식(설 연휴로 1월 31일), 순국 100주년 특별전시회(10월~2024년 1월). 기념학술대회(10월), 주요 활동터 표지석 설치(연중) 등 다양한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