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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3/01] 강원도 원주의 만세시위 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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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들의 큰 외침, 야간 산상 봉화시위


기죽지 않고 숨죽지 않는 작은 불씨들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모여 봐야 몇 명, 또는 몇십 명에 불과했지만 굴종하고 침묵하기를 거부했다. 주로 한밤중에 마을 뒷산이나 공터에서 어둠 속에 횃불을 밝혔다. 일제는 한밤중에 6명이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른 만세시위 참여자에게 징역 8월형을 부과했다. 병합 후 10년간 전력을 다해 일사분란한 지방통치체제를 구축했는데도 기죽지 않고 숨죽지 않는 향촌공동체들의 자율성과 결속력에 두려움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작아도 너무 작아 어디서도 헤아림을 받지 못하는 원주 작은 마을, 작은 동리들의 만세시위를 보자.


전국이 독립만세로 들끓었던 그해 3월 강원도 도청 소재지였던 원주는 3월 하순이 되도록 죽은 듯이 있었다. 그 어색한 침묵을 깨고 외곽의 작은 마을들이 일어섰다. 모여 봐야 몇 명, 또는 몇십 명에 불과했지만 굴종하고 침묵하기를 거부했다. 주로 한밤중에 마을 뒷산이나 공터에서 어둠 속에 횃불을 밝혔다. 군중 수가 50명이 안 되면 일제도 통계로 잡지 않았던 작은 마을의 시위. 일제는 한밤중에 6명이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른 만세시위 참여자에게 징역 8월형을 부과했다. 병합 후 10년간 전력을 다해 일사분란한 지방통치체제를 구축했는데도 기죽지 않고 숨죽지 않는 향촌공동체들의 자율성과 결속력에 두려움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작아도 너무 작아 어디서도 헤아림을 받지 못하는 원주 작은 마을, 작은 동리들의 만세시위를 보자. 


남부지역 - 귀래면의 만세식 


천도교인 김현수(金顯洙)와 김현홍(金顯洪), 유생 서상균(徐相均), 서당 훈도 이정년(李鼎秊)이 주도자로 나섰다. 이들은 1월 21일 갑작스럽게 별세한 고종 황제 서거 소식을 듣고 마을에서 황제를 애도하는 망곡례를 올렸었다. 


망곡례를 올렸던 그 장소에서 4월 7일 평촌마을 사람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했다. 작은 마을의 작은 시위였다. 


다음날인 4월 8일에는 귀래리·평촌·고청·새동말 등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마을 한가운데 큰 태극기를 세우고, 김현수가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어 독립만세를 불렀다. 연이틀 동안 이러한 만세시위를 마을 사람들은 만세식(萬歲式)이라 했다. 


운남리 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하자 주도자의 한 사람인 서장균이 외쳤다. 


“일본놈에게 잡혀 갈 바에야 죽는 것이 낫다!”


서장균은 칼로 자기 목을 몇 번이고 찔렀다. 원주병원에 옮겨져 4개월간 치료를 받아 목숨은 건졌으나, 벙어리가 되었으며 평생 목에 고무호스를 달고 살았다.


김현수와 김현홍은 징역 8월의 옥고를 겪었다. 


4월 9일 흥업면 


4월 9일 흥업리에서 이현순(李賢淳)과 홍대성(洪大成)이 주도자로 나섰다. 홍학성(洪學成)이 온 마을을 돌며 마을 주민 약 40명을 모았다. 이들은 주민들을 이끌고 면사무소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갔다. 


“면 직원들은 다 도주한 것 아니야?”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에워싸고, 면장 서정우(徐廷禹)를 나오게 했다. 면장은 얼굴도 내밀지 않고 면직원을 시켜 해산하도록 회유했다. 군중들은 해산을 거부했다. 마침내 면장이 나와 만세를 부르자,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다.  


4월 8일 흥업면 사제리(沙堤里)에서는 원성규(元成圭), 이재손(李在孫), 윤산악(尹山岳)이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서당 교사 김상익(金商翼)에게 “4월 9일 아침 마을 앞 공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는 내용의 회람문(廻文) 제작을 부탁했다. 김성관이 이 회람문을 사제리 20여 가구 주민들에게 돌리며 독립만세운동 참가를 권유했다. 


4월 9일 마을 주민 10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원주헌병분대에서 출동하여 24명을 체포했다. 원성규, 이재손, 윤산악은 각기 징역 1년의 옥고를 겪었다.


서부지역 - 지정면


4월 8일 밤 9시 지정면 면내에서 200명의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 올랐다. 주민들은 화톳불을 피우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을 신호로 갈현리에서는 이석경이 약 20명의 주민들과 마을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밤 12시경에는 김원삼이 약 20명과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보통리에서 이면직(李冕稙)이 12~3명의 마을 사람들과 자갑촌 뒷동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원주 수비대 병력과 월송리 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도자 8명을 체포했다. 깜깜한 밤중이었던 까닭에 헌병들이 이곳으로 달려가면 저곳에서 만세소리가 터졌고, 저곳으로 달려가면 이곳에서 만세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2시에야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다. 이면직은 징역 6월형을 받았다. 


이날 가곡리 유복렬(柳復烈)은 밤 10시경 동리의 박종명(朴鍾鳴) 집 앞에서 주민 6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한밤중 6명밖에 나올 사람이 없는, 작아도 너무 작은 만세시위였다. 일제는 시위 참여자에게 징역 8월형을 부과했다. 간현리 뒷산에서 20여 명과 독립만세를 불렀던 이석경(李錫敬)도 징역 6월형을 받았다.  


안창리에서는 4월 8일 흥법·월운·창말의 뒷산에서 각기 수 10명씩 모여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9일에도 김사봉 등 몇 명이 마을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사봉도 징역 6월형을 받았다. 


건등면


4월 8일 밤 8시 30분 건등면 문막리 산위에서 부근 마을에서 모인 주민 약 200명이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반계리에서는 곽한선(郭漢璇)이 나서 구장 이도순(李道淳)과 함께 홍승복(洪承復) 선생의 가르침을 받는 안양의숙(安養義塾) 학도들을 동원하여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오게 했다. 약 1백 명이 모였다. 이들은 구은평(九銀坪)에서 만세를 부르고, 다시 고종 황제 망곡제를 지낸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궁촌리에서는 김현구(金顯九)를 중심으로 유인수(柳寅秀)·김원기(金元起) 등이 앞장서 5~60명의 마을 주민들을 모았다. 구장 이희원(李熙元)은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김현구가 꾸짖었으나 들으려 하지 않았다. 4월 9일 김현구는 옷베에다 태극기를 그려 만들어 강제로 구장에게 쥐어 주며 앞장세웠다. 이들은 마을 뒷산 국수봉 자락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궁촌리 서석동에서는 밤 10시경 최재희의 주도로 약 20명의 주민들이 마을 안에 있는 밭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원주 주둔군 수비대 병력과 문막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했다. 21명이 검거되었는데, 김현구와 곽한선은 징역 1년형, 최재희와 유인수는 각각 징역 10월형을 받았다.


동화리에서는 김준기 등의 주도로 수십 명이 매사골(梅沙洞)과 동화골(桐華洞) 뒷산 달맞이 언덕에 모여 봉화시위를 했다. 건등리 등안골, 지정면 안창리와 흥법동·창말(倉村), 월운동 뒷산과 간현리(艮峴里) 방면에서 봉화를 올려 호응했다. 


부론면 


4월 8일 밤 9시 부론면에서 약 200명이 부근 산 위에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건등면, 지정면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흥호리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원주 수비대의 병력 지원을 받아 출동했다. 시위대는 다음날 4월 9일 오전 2시에 해산했다. 주도자 8명이 체포되었다.  


4월 9일 부론면 법천리에서 표광천(表光天), 지천복(池千福)의 주도로 수십 명이 응봉산 위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손곡리 김복기(金福基), 정완용(鄭完用), 서당 훈장 이재관(李在琯)과 이은교(李殷敎)는 4월 11일 밤 주민 수십 명과 마을에 모여 김복기, 정완용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와 같이 원주 외곽 작은 마을 주민들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죽어 있지 않았다. 한밤중에 뒷산에 올라가 횃불을 피우며 독립만세를 부름으로써 억압과 어둠의 시대를 물리치고 자유와 독립의 새 시대를 맞고자 했다.  


필자 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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