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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3/01] 절개와 지조의 상징 을사년 6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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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망(國亡)의 울분을 죽음으로 항거한 충신들


순국으로 임금 은혜에 보답하고

백성들에게 경각심 불러일으켜


글 | 편집부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돈의문 밖 배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며칠을 통곡하다가 자살했다. 최초 순국자였다. 현직 고관인 민영환이 11월 30일 국민의 궐기를 호소하며 순국했다. 그의 자결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순국과 항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79세의 문신 조병세, 전직 고관 홍만식과 송병선, 하급 관료 이상철과 김봉학 등 ‘을사년의 6충신’이 민영환의 뒤를 이었다. 인력거꾼도 순국 대열에 동참했다. 이렇게 자결한 사람이 1905년 12월에만 10명이 넘었다.  

순국의 도화선
민영환(1861~1905)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들은 민영환(閔泳煥, 1861~1905.11.30)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전 좌의정 조병세와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조병세는 고령으로 낙향했다가 소식을 듣고 79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했다. 

두 사람은 상소문을 가지고 궁궐로 들어가 을사5적 처형과 조약 파기를 호소했다.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 조병세는 체포하고 민영환을 비롯해 백관들은 강제 해산했다. 민영환은 굴하지 않고 거듭 상소를 올리며 궁궐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11월 29일 체포되었으나 고종의 배려로 당일 석방되었다.



민영환이 약해진 몸을 추스르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상소를 계속 올린다고 해서 성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백성에게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겠다며 비장한 결심을 했다. 민영환이 단도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은 11월 30일 아침 6시쯤이었다. 하지만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다음 날 시신에 수의를 갈아입히려고 할 때 옷소매에서 서구식 명함 앞뒷면에 한자로 깨알같이 적어놓은 유서 몇 장이 발견되었다.

한 장은 “영환은 죽어도 아니 죽는다(死而不死)”면서 백성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유서였고, 나머지는 청국·영국·미국·프랑스·독일 공관 앞으로 보낸 유서 겸 편지였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튿날, 함께 상소를 올린 조병세가 극약을 먹고 자결했다. 같은 날 전 참판 홍만식도 자결하고 학부 주사 이상철, 평양진위대 군인 김봉학 등 각계각층에서 순국이 이어졌다. 민영환의 집 행랑에 거처하던 인력거꾼은 뒷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나라 향한 끝없는 충애
조병세(1827~1905)

1827년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조병세(趙秉世, 1827~1905.12.1)는 26세 때 벼슬을 받아 나랏일을 시작했다.

1864년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암행어사, 대사헌, 공조·예조·이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893년에는 좌의정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중돼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돌연 가평으로 떠나 정계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1896년에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시무 19조를 상소하고, 1900년 재입궐해 국정개혁의 필요성을 외쳤다. 나라를 향한 선생의 충애(忠愛)는 끝이 없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9세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경해 을사5적의 처형을 수차례 요구하며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다. 일본군에 의해 연금되고 풀려나기를 반복하다 가평 시골집으로 강제 추방되고 말았다.

이후 민영환의 자결 소식에 다시 상경해 항쟁을 시도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껴 1905년 12월 1일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전국 동포는 내가 죽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각자 분발하여 나라를 도와서 우리 독립의 기초를 길러 나라가 망한 부끄러움을 씻어낸다면 나는 비록 구천 지하에서나마 춤추며 기뻐할 터이다.”

고종은 황태자를 보내 특별한 예를 갖춰 장례를 지내게 했고, 그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충절 지킨 관료들
홍만식(1842~1905)·송병선(1836~1905)

홍만식(洪萬植, 1842~1905)은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며 갑신정변의 주역인 홍영식의 친형이다. 18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수찬·집의 등을 역임하고, 동부승지를 거쳐 여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이조참판까지 지냈다.
1884년 아버지가 의복제도 개정을 반대하다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동생 홍영식이 김옥균·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키다가 실패해 사형당하자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했고, 그도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해 체포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20여 년간 여주의 산골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며 의관을 차려입고 부친의 묘소에 사별 인사를 드리고 독약을 삼켜 순국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고종은 장례비용을 궁내부에서 넉넉하게 보내주도록 하고, 특별히 종1품 의정부 참정대신의 직함을 추증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12.30)은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서연관과 경연관을 지냈다. 1882년에는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됐으나, 사임하고 충북 옥천으로 내려가 후학을 양성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해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는 등 을사조약 반대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경무사 윤철규에게 속아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으로 이송당하면서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했다. 고종은 충절을 기려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젊은 순국자들
김봉학(1871~1905)·이상철(1876~1905)

김봉학(金奉學, 1871~1905)은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일어나자 김하락의 휘하로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제2대십장으로 활약했다. 그 뒤 군대에 입대해 평양진위대에서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부대가 서울로 소환되어 시위대 제3대대 제2중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국권을 박탈하고 민영환·조병세 등이 자결로써 항거하자 김봉학은 흐느껴 울면서 “대대로 녹을 먹던 신하로서 순국함은 당연하며, 나 또한 군인으로서 6년이나 지내면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원수인 왜놈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했다.

동지들과 모의해 일제의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계책을 짜고 있다가 일이 누설되어 실패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추증되었으며,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철(李相哲, 1876~1905.12.3)은 대한제국 학부주사(學部主事)로 있으면서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을사늑약 반대운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원통함을 참지 못해 12월 3일 음독, 자결로써 을사늑약에 항의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학부협판(學部協辦)에 추증되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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