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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역사를 다시 생각한다 [2022/11] 대한제국 비운의 역사 덕수궁 중명전과 정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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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길에서 마주한 망국의 서사


열강의 격돌 속 풍전등화 같던 시대 

노랗게 물든 이 길에 깊은 슬픔이…


글 | 편집부  사진 | 한국관광공사 


정동길은 아름답다. 특히 가을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사이로 거닐다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수많은 예술가가 정동길을 배경으로 노랫말을 썼고 시와 소설을 썼다. 눈을 감고 마음을 열면 그 낭만의 거리에 깊은 슬픔과 비애가 스며든다. 풍전등화와 같던 대한제국 시기, 열강의 격돌 속에서 마침내 을사늑약의 비극을 맞이하고 망국의 길을 걸어야 했던 통한의 역사가 곳곳에 서려있다.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의 길을 거쳐 옛 러시아공사관을 거닐며 1905년 11월 17일을 떠올려본다.  


덕수궁은 누구나 잘 알지만, 덕수궁 중명전은 잘 모른다. 덕수궁에 들어가 찾아봐도 중명전이라는 간판은 없다. 몇 년 전 친구와 정동길을 산책하다가 소란한 인파를 피해 호젓한 골목골목을 배회하다 우연히 발견한 공간, 솔직히 그때까지 중명전을 잘 몰랐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장소가 잊히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와 슬픔이 교차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까닭일까. 정동길을 걸을 때마다 낭만보다 아픔이 가슴속에서 일렁이곤 한다. 백 년 전 그 가을에도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을까. 


덕수궁 밖에 있는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은 이름과 달리 덕수궁 밖에 있다. 정동극장 쪽 사잇길로 들어가면 보인다. 정동극장 옆에 안내판이 있다. 좁다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세상과 단절된 듯한 깊은 정적 속에 붉은 벽돌 2층 건물이 보인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황실도서관으로 1899년경 완성되었다. 서양식 1층 건물로 만들어졌다가, 덕수궁 대화재 이후 정면과 양 측면의 3면에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되어 1904년 고종 황제의 거처로 사용되면서 역사의 중심에 섰다. 


1905년 11월 17일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재건해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대한제국 역사만큼 파란만장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중명전은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을사늑약 현장을 재현해 놓았으며, 을사오적에 대한 인물 정보도 자세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밤, 참정대신 한규설은 마루방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날 밤의 회고담도 볼 수 있다. 고종은 해외에 친서를 보내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다. 친서는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각 나라에 대한제국이 독립된 주권 국가임을 알리고 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다. 5개국 언어로 된 친서에 황제의 어새를 찍어보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이위종·이준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만국평화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위종은 백 년이 지나 영상 속에서 대한제국의 독립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당당히 연설하고 있다.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과 1917년 러시아에서 생을 마감한 이상설의 유언은 가슴을 아프게 울린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좁다란 골목 ‘고종의 길’


덕수궁 중명전에서 정동공원으로 조금 걷다 보면 ‘고종의 길’이 나온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이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당시 덕수궁에서 러시아 공관으로 오고 갈 때 이용된 피난길로 추정된다. 좁다란 돌담길을 숨죽이며 몰래 걸어야 했던 조선의 마지막 왕을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하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덕수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종은 결국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항간에 퍼졌고, 고종의 사망으로 항일 감정은 극에 달해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인산일)에 맞추어 3·1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을사늑약부터 3·1운동까지 이어진 파란만장한 역사의 물줄기가 정동길을 따라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리라.


고종의 길은 정동공원으로 이어진다. 고종의 길을 따라가면 ‘정동공원’이 나타난다. 한국 가톨릭의 첫 수도공동체였던 정동수녀원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공원 오른쪽 언덕에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다.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이 잦아지던 19세기 말 정동 일대는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서구 열강의 공사관 중 가장 높은 곳에, 가장 크고 화려한 모습으로 러시아공사관이 들어섰다. 현재 그 화려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건물 북동쪽에 있던 탑만 복원돼 있다.


이화학당과 정동제일교회


다시 정동길을 걷는다. 이화학당을 지나며 1919년 3월 1일 기숙사 담을 넘어 거리 시위에 참석했던 여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펼쳤던 교사들을 떠올린다. 조금 더 걸으면서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정동제일교회가 보인다. 1885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독립운동 역사와 인연이 깊다. 


담임목사인 최병헌은 독립신문·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의 문필가로서 활동했었다. 독립협회와도 연관이 많은 곳으로, 서재필, 이필주, 박동완, 유관순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교회에 있었다.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복귀한 서재필은 정동교회 청년부를 중심으로 토론과 타협을 가르치는 협성회를 만들었다. 협성회는 국내 민족의식 계몽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 독립협회로 이어졌다.


정동제일교회는 국내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파이프오르간 속 송풍구에는 어른 몇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신문을 집필하거나 3·1운동에서 쓰인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새 덕수궁 대한문에 다다랐다. 1919년 3월 1일, 대한문 앞마당에선 대한독립을 외치는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남녀노소가 모여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에 희망의 빛을 밝혔다. 문득 지난달 ‘정동야행’ 행사에서 일왕과 일본 순사 복장을 대여해 논란이 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해당 업체는 “재미있게 진행하려다 일이 커졌다”며 죄송하다는 뜻을 밝혔다. 정동길에 서린 역사의 아픔을 알았다면, 누가 ‘재미’를 이유로 이런 실수를 했을 터이며, 어느 국민이 그런 옷을 입고 ‘재미’있다며 사진을 찍었겠는가. 역사의 망각과 무지가 더없이 부끄럽고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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