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 홍양호 전 통일부 차관(북한연구소 석좌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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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교류협력 최전방에서 민족화합과 통일에 앞장
독립의 그날까지 목숨 바친 선열들처럼
‘진인사대천명’ 자세로 통일 준비해야
인터뷰 | 심재추 월간순국 편집주간
글·사진 | 편집부
홍양호 전 통일부 차관은 40년간 통일 분야 한 우물만 파온 국내 최고 전문가다. 민간교류, 이산가족, 경수로발전소, 개성공단 등 교류협력 현장업무를 주로 맡으며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경수로기획단 정책조정부장, 남북회담사무국 상근회담 대표 등 요직을 두루 거쳐 2008년 행정고시 출신 최초로 차관에 임명되었다. 2011년부터 3년간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장을 맡아 개성공단을 총괄하며 남북 경제협력의 큰 진전을 이끌었다. 북한 핵 문제로 개성공단이 갑작스럽게 폐쇄될 당시, 끝까지 현장을 지켜 인적·물적 피해를 막은 일화는 유명하다. 퇴임 후에도 민간 통일운동에 적극 동참, 통일의 우물을 쉼 없이 파고 있는 홍양호 전 통일부 차관을 1월 10일 북한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분단국가 청년의 간절함으로 40년간 한 우물을 파다
“행정고시 공부할 때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시대 청년들이 가장 보람 있게 해야 할 일은 통일’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저 역시 분단국가 청년으로서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사회에 봉사하고 인생에서 바람직한 일을 찾고자 고민하던 터라 마음에 많이 각인되었습니다.”
통일은 그렇게 청년의 가슴속에서 조용히 싹텄다. 1977년 행정고시 합격(21기) 후 해운항만청으로 첫 발령이 났다. 박정희 정부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을 빌려 해운항만 분야를 육성하던 시기였다. 해외 연수 기회도 많았고 중요한 국가사업이니 전망도 밝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애착이 가질 않았다. 부산지방해운항만청에서 2년 정도 근무하던 중 국토통일원에서 행정사무관을 전입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슴이 뛰었고 운명처럼 이끌렸다.
“주변에선 어렵게 합격한 고시 출신이 왜 하필 힘도 없는 연구소 같은 곳으로 가려 하느냐, 정신 나간 놈 아니냐며 반대를 많이 했어요. 선배들은 보직이 마음에 안 들면 좋은 보직을 주겠다고 말렸고요. 하지만 대학 시절 마음속에 잉태되었던 ‘통일’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위해 과감하게 도전하고 싶었어요. 인생에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들을 설득했죠. 워낙 간절했거든요.”
그렇게 1983년 국토통일원에 자원 입부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초기엔 남북관계와 사회 분위기가 좋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1988년 노태우 정부가 7·7선언을 한 이후에야 남북교류의 길이 열리면서 통일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국장 때 TV에 노출되는 일이 많아지자 그를 말렸던 선후배들이 ‘선견지명이 있었다. 보람 있는 일을 선택해 중요한 직책을 하고 있다’며 치켜세웠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분단국가 청년으로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매 순간 즐겁게 일했다.
노력만큼 운도 성과도 따라주었다. 통일원 총무과장, 교류협력국 심의관, 경수로기획단 정책조정부장, 인도지원국장, 경수로기획단 정책조정부장, 남북회담사무국 상근회담 대표, 기획관리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원만한 대인관계와 빈틈없고 강한 추진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8년 행정고시 출신 최초로 차관에 임명되는 영예도 누렸다. 민간교류, 이산가족, 경수로발전소 등 남북관계 교류협력 현장업무를 주로 맡으며 통일로 가는 길 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차관 퇴임 이듬해인 2011년부터 3년 동안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장을 맡아 개성공단을 총괄했다.
“당시 개성에서 숙식하면서 남쪽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현장에서 직접 챙겼죠. 남북관계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어요.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 있으면서 남북협력적 관계를 개선하고 북한 사람들 생각을 많이 변화시킨 부분에서 큰 보람을 느껴요.”
경제협력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기대하며 동분서주했던 그에게 개성공단 중단은 무엇보다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2013년 북한 핵 문제로 폐쇄가 결정되었을 때 그는 개성공단 총괄책임자였다. 갑작스러운 남북관계의 위기, 작은 실수 하나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는 끝까지 개성공단을 지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잠재적 위험 속에서도 인적·물적 피해 없이 마무리되었다.
남북통일은 ‘제2의 광복’,
민족의 책무이자 역사적 과업
홍양호 전 통일부 차관은 퇴임 후에도 변함없이 통일을 위해 달려왔다. 북한연구소 석좌연구위원,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남북사회통합교육원장 등을 맡으며 민간 분야에서 통일이라는 한 우물을 파고 있다. 1983년 국토통일원 시절부터 헤아리면 통일 분야에 몸담은 세월이 어언 40년이다.
그에게 통일을 왜 해야 하는지, 원론적인 질문을 건넸다.

역사적 관점에서,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그는 통일의 당위성을 이야기했다. 이어 1980년대 미국 조지아대학교 유학 시절 에피소드 하나를 꺼냈다. 수업을 마치고 가는데 현지 여학생이 따라왔더란다. 일본어를 배우게 해달라는 이유였다. 당시 일본이 세계에서 떠오르는 별로 부각되면서 일본어 열풍이 불던 때였다. 미국인 입장에서는 한국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줄 알았던 것. 당황한 그는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 한국인은 한국어를 쓴다’고 대답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어요. 그전에도 외국에서 분단국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거든요. 학창시절 역사책에선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는데, 현실에선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그때 국력이 강해져야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구나, 통일이 바로 국가적 자존심과 연결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행복’과 ‘미래’의 관점에서도 통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같은 민족이 자유롭게 오가는 일은 인간 개개인의 행복을 위해 중요해요. 반대로 같은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건 인간으로서 불행한 일이죠. 미래를 위해서도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늘어나면서 ‘통일이 되면 우리가 손해 아니냐. 따로따로 살면서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게 낫다’는 의견도 많은데, 통일이 되어야 민족이 더 부흥하고 시너지 효과도 엄청나게 커져요.”
수백 개의 험난한 고개 넘으려면
나라 정체성 지키는 역사교육 중요
통일의 당위성을 떠나 현실로 시선을 돌리면 통일 문제는 막막하다. 우선 국제적으로 환경이 안 좋다. 미·중 패권경쟁에서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오래 갈 전망이다.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
“미래와 통일을 위해서는 일본도 끌어안아야 해요. 현재 과거사 문제로 단절되어 있는데 과거는 잊지 말아야 하지만, 과거에 매몰되어서 미래로 가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이념적으로 다르지만, 국익 차원에서 국제적 안목으로 끌고 가야 해요. 북한의 핵 문제는 차기 정권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주요 사안입니다.”
북한의 왕조체제도 통일로 가기 위해 힘든 구조다. 진영논리로 대립하고 있는 국내 상황도 걸림돌이다. 내부 통합을 먼저 이루어야 외부 통일도 따라오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쉬운 일이 하나 없다. 그럼에도 그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통일에 대한 여건이 안 좋은 상황이지만, 조국독립 그날까지 목숨을 바친 선열들처럼 통일도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때가 온다고 믿어요. 진인사대천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최대한 노력을 하고 하늘에 뜻을 맡기는 거죠.”
한독통일자문위원회에서 7년간 한국 측 위원을 맡아 동서독 통일 당시 책임자와 주역 등 다양한 전문가를 만나온 그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중요한 명제를 깨달았단다. 최선의 노력이 우선이지만, 마지막에는 하늘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 통일로 가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고, 수백 개의 험난한 고개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잘잘못을 따질 문제가 아니죠. 어느 나라든 정체성을 지키는 게 역사교육이며, 정체성을 잘 지켜가는 나라가 부강해요. 남북관계가 어려워지고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용론이 확산할수록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정신교육이 중요합니다.”
개인주의와 현실적 이해관계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나라를 위한 희생정신과 결기가 구체화되는 정신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통일은 물론, 국가의 미래 또한 암울할 수밖에 없다. 그는 ‘열린 민족주의 정신’도 강조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내부 역량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국제적 협력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폐쇄적인 ‘닫힌 민족주의 정신’으로는 부족해요. 무엇보다 우리 내부의 통합정신을 키우는 일이 중요해요. 스스로 분열되면 통일의 내부적 동력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분단 극복하고 통일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도 순국·호국정신 키워야
홍양호 전 차관은 역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많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장 등을 역임한 김희곤 안동대학교 명예교수와 죽마고우이며 이종정 전 국가보훈처 차장과 고등학교 동기다. 덕분에 남다른 역사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회장을 만나 ‘순국’과 ‘호국’에 대한 차이를 알게 된 후엔 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순국과 호국의 차이를 잘 모르는 국민이 많아요. 순국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고, 호국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죠. 통일도 순국과 호국의 희생정신과 꼭 해내야겠다는 목표의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는 우리 시대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국정신과 호국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제강점 36년 암울했던 시절에도 빼앗긴 나라를 반드시 되찾겠다며 목숨 바친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과 결기가 있었기 때문에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어요. 6·25전쟁도 북한에 비교해 남한의 군사력이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숨 바쳐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사수한 수많은 군인과 젊은 학도병의 희생정신과 결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죠. 통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76년간의 분단 현실과 앞으로 언제 통일될 지 모르는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민족적 결기와 우리 국민의 희생정신이 있다면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기고 진심과 최선 다할 뿐. 그 과정 안에 희망이 있음을 알기에, 그는 통일을 이루는 그날까지 시대적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그리고 행복하게 걸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