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초대석

[2022/03] 김황식 전 국무총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페이지 정보

본문

실력과 인품으로 국민에게 존경받는 ‘한국의 현자’  


사회 통합과 국익 최우선하는 

관용과 실용의 정치 리더십 절실


인터뷰 | 심재추 월간순국 편집주간 

글·사진 | 편집부 


 1974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시작된 공직 생활은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치며 40년간 이어졌다. “오직 바른길만이 생명”이라는 철학을 뿌리 삼아 매 순간 ‘온화한 정도(正道)’를 걷고자 노력했다. 국익을 먼저 고민하고 화합과 통합에 앞장섰다. 총리직을 수행할 때는 합리적인 국정 운영과 소탈한 성품으로 국민에게 사랑받았다. 연평도 포격 전사자 추모식 때 40분간 장대비를 맞으며 서 있던 모습은 여전히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현재 안중근의사숭모회와 호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대선을 앞두고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이라는 명저를 펴내 정치 리더십에 관한 화두를 던졌다. 그 누구보다 깊은 애국심으로 대한민국의 발전 방향에 대해 고뇌하고 있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만났다.  


얼굴은 정직하다. 삶의 궤적이 그 안에 차곡차곡 정직하게 새겨지는 까닭이다. 숨길 수 없는 생(生)의 징표다. 한동안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거센 풍랑을 버텨온 고난의 흔적도, 위선의 가면이나 작위의 미소도 안 보였다. 그저 평화롭고 고요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를 닮은 얼굴 안에는 철학자의 고뇌와 성직자의 위로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듯했다.



40년 공직 생활 내내 화두였던 독일에서

대한민국 발전 방향의 답을 찾다 


먼저, 대선을 앞두고 지난 1월 출간한 책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는 2013년 2월 국무총리직에서 내려온 후 6개월간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독일 정치를 공부하며 우리나라의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실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콘라트 아데나워부터 빌리 브란트 총리까지 다룬 1권을 먼저 출간했고, 헬무트 슈미트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까지 다룬 2권은 연말에 나올 예정이다. 


“40년 공직 생활 내내 독일은 제게 화두였습니다. 전범국이었던 나라가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우뚝 서며 유럽의 최강자로 부활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같은 분단국가였는데 독일의 오늘과 한반도의 오늘은 왜 이렇게 다를까, 그 해답을 찾고 싶었죠.”


그렇게 퇴임의 여유를 누릴 틈도 없이 곧바로 독일로 떠났다. 홀가분한 마음 안에 공부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다. 독일 정치에 관한 자료들을 연구하며 오랜 질문에 대한 해답에 찾아가던 그에게 ‘독일 총리들’이 섬광처럼 반짝였다.

“독일이 바람직한 국가 모델로 발전하는 데 총리 개인의 실력과 인품이 중요한 역할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대 독일 총리들을 보면 정파와 권력욕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과 사회 통합의 관점에서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헌신해왔고, 대화와 타협으로 국정을 이끌어간다는 자세와 인품을 가졌어요. 그 과정에서 흔쾌히 자신의 정치적 희생도 감수했습니다.”


일례로 슈뢰더 총리는 통일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하르츠 개혁안을 만드는 대신 총리직을 내려놨다. 브란트의 동방정책도 영토를 포기해야 하는 굉장히 힘든 정책이었고, 슈미트의 핵 배치도 당내 평화주의자들의 반대에도 국가안보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고 추진했던 정책이었다. ‘정치 후진국’이라는 불명예를 가진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귀담아야 할 대목이 아닐까. 그는 대선 주자들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건넸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사회 통합과 국익입니다. 편 가르기를 자제하고 사회 각 부문의 여러 갈등을 잘 봉합해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해요. 인기와 표를 얻기보다 국가 이익과 장래를 위한 각도에서 정책을 다듬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포용과 관용의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독일 공영방송 여론조사에서 아데나워 총리가 ‘국민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 1위로 뽑혔어요. 그는 국가의 기틀을 굳건하게 세운 1대 총리였지만, 88세에 쫓겨나다시피 물러난 흠이 있는 인물이죠. 하지만 그분의 삶 전체를 보고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추앙하는 것은 그만큼 관용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누구나 흠이 있어요. 우리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길 바라기보다 나름대로 선한 쪽을 높이 평가하는 관용의 정신을 좀 더 발휘했으면 좋겠어요.”


정도와 공정 그리고 공감으로 

40년 공직을 명예롭게 마무리하다


김황식 전 총리는 194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74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2005년 대법관, 2008년 감사원장을 거쳐 2010년 제41대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2013년 2월 총리직을 내려놓고 명예롭게 퇴임할 때까지 장장 40년의 세월을 공직에서 보냈다. 박정희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이어진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격동기, 거센 풍랑의 한가운데서 살아온 셈이다.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변할 때마다 많은 이들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졌지만, 그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별다른 구설수 없이 승승장구했다. 국무총리직을 역임할 때는 합리적인 국정 운영과 소탈한 성품으로 국민에게 사랑받았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드문 이력이다. 


“광주제일고를 다닐 때 학교에 광주학생의거 탑이 있었어요. 동판에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고 씌어 있었죠. 어린 시절 그 문구를 보면서 바른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오랜 법관 생활을 하면서는 무엇이 옳고 그르냐 공정하게 판단하는 데 기준을 두고 일을 해왔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불합리한 요소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늘 있었고요. 성경 로마서 12장에 있는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라’는 구절은 지향해야 할 가치관으로 삼았어요. 더불어 웃고 함께 즐거워하며 낮은 데로 처하는 자세야말로 자신에게 유익하고 나라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정도와 공정 그리고 공감이 40년 공직 생활을 이끈 원동력이었음을 깨닫는다. 거기에 진심과 성실 그리고 애국심이 더해져 흔들리지 않는 뿌리로 성장했으리라. 


그는 공직 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기억으로 국무총리 시절을 꼽았다. 행정부를 통할하는 최전방에서 이해가 상충하는 숱한 갈등과제들을 원칙과 상식에 맞게 국민의 신뢰를 얻어가며 원만하게 해결했을 때, 후유증이 많이 남을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시빗거리 없이 잘 마무리되었을 때, 그는 공직자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2010년 G20 정상회담과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개최 등 국제적 행사를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인 일, 국민 염원이었던 평창올림픽을 3수 끝에 개최해 국민에게 기쁨을 전한 일을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이어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는 사법부에 대해,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의 묘수에 대해 물었다. 그는 법조계 원로로서 균형 잡힌 견해를 피력했다.


“재판 결과가 판사에 따라 다를 수 있어요. 그래서 3심제가 있는 거고요. 다만 그것이 불합리한 요소, 가령 판사의 개인적·주관적·정치적·이념적 생각으로 판결하면 잘못입니다. 요즘 국민들이 판결이 잘못되지 않았나 의구심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합니다. 법률은 같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중요한 건 헌법에서 말하는 양심은 판사 개인의 주관적 양심이 아니라 사회공동체가 공통으로 가지는 객관적 양심을 의미합니다. 내 생각은 이것이지만, 사회공동체의 양심이 저것이라면 자기의 소신을 버리고 그쪽을 따라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재판이 자기 소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판사들이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죠.”


안중근 의사 처형 때까지 한일 친선 강조

평화로운 관계 회복에 힘 보탤 것


그는 2017년 7월부터 제10대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맡아 인생의 정도를 이어가고 있다. 안중근의사숭모회는 1963년 설립되어 정부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안중근 의사 관련 사단법인으로, 특히 안 의사의 평화사상이 바르게 인식될 수 있도록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내 지회 또는 관계기관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으며 사료 조사 및 발굴, 유묵석비 및 동상 건립, 기념관 건립 및 관리, 생계가 곤란한 유족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는 40년 공직 생활 때처럼, 여전히 합리적인 업무 능력과 소탈한 인품으로 두루 존경받고 있다. 무엇보다 진심으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진심을 담아 국내외에 안중근 의사를 기리고 선양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안 의사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두 눈은 자부심과 존경심으로 빛났다. 


“안중근 의사는 여느 독립운동가와 다른 측면이 있어요. 먼저, 활동 시대가 달라요. 안 의사는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전인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어요. 일제 치하에 살았던 분이 아니죠. 그는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을 꿰뚫고 미리 대비한 ‘선각자’였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의기에 넘치는 투쟁가를 넘어서 깊은 사상을 정립한 ‘사상가’였어요.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일본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일본의 생각을 바로잡아서 한·중·일이 서로 평화롭게 협력하는 가운데 서양세력을 물리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가 한·중을 침탈해서 일본 중심으로 동양평화를 이루려 했기 때문에, 이토를 제거해야 동양평화를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의거를 결행하게 되셨죠.”


그는 안중근 의사가 처형되는 순간까지 한일 친선을 강조했고, 함께 평화롭게 지내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이어 독일과 프랑스 관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덧붙여 말했다.


“과거 독일과 프랑스는 수백 년에 걸쳐 서로를 침공하는 앙숙 관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성립을 선포했어요. 1차 대전에서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선에 참호를 파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으며, 2차 대전에서 독일 나치는 마침내 파리를 함락했어요. 이렇듯 두 나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희생을 치러가며 서로를 침공한 역사를 갖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현재 유럽연합(EU)의 큰 기둥으로서 서로 화폐를 공유하고 NATO의 일원으로 공동훈련을 하고 있어요. 또 난민 문제나 기후변화, 환경 문제에 있어서도 긴밀히 협조해 국제사회에서 한목소리를 내고 있고요. 바로 안중근 의사가 백여 년 전 일찍이 동양평화론에서 주장한 내용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안 의사의 평화정신이 한일 양국에 잘 전달되도록 더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전범국 일본의 반성을 전제로 한 상황에서, 안 의사가 꿈꿨던 평화로운 이웃 나라로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탤 계획이다. 


“더 많은 국민이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와서 관람했으면 좋겠어요. 국민 성금으로 만들어져 그 의미가 크고 전시물도 충실하고 관람료도 무료입니다. 이곳에 와서 깊이 감동한 일본 관람객은 현지에 가서 안 의사 공부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고 해요. 일본인들은 안 의사가 구차하게 항소하지 않고 순국한 사연,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 안 의사의 유언에서 특히 감명을 받더라고요. 역사에서 그런 인격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도 안중근 의사에 대해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고, 숭모회에서도 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인터뷰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하고 따뜻한 인품이 돋보였다. 균형 잡힌 시각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이 온화한 말투 안에 녹아있었다. 문득 독일의 5대 총리인 헬무트 슈미트가 떠올랐다. 슈미트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20년 이상 언론사 편집장 겸 공동발행인을 하면서 독일 사회에 좋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국민들은 ‘독일의 현자’라 칭송하며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그에게 해답을 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현자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김황식 전 총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