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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 김경한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장(전 법무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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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초월해 최고 지도자로 추앙받은 ‘만주벌 호랑이’  


민족통합 이끈 ‘일송 정신’ 되살려

분열과 갈등의 시대 헤쳐나가야


글 l 편집부


  고향 ‘안동’으로 이어진 오랜 인연. 일송 김동삼 선생의 문중인 내앞김씨(의성김씨)와 혼인(婚姻)으로 연을 맺었고, 조부가 협동학교 1회 졸업생이었으니 사제(師弟)로 연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일송의 인품과 명성을 널리 들었던바, 늘 ‘존경’의 마음 가득했다. 청년으로 중장년으로 세월이 바뀌는 동안 선생의 명성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보며 ‘죄송’의 마음이 싹텄으리라. 검사부터 법무부 장관까지 화려한 공직생활이 32년간 이어졌고, 퇴임 후에는 봉사활동 하며 마음 빚을 갚느라 또 십여 년이 흘렀다. 그렇게 팔순을 앞둔 나이에 이르렀다. 그는 “후세들 성의와 노력이 부족해 선생이 많이 잊혔다”며 기꺼이 생(生)의 ‘마지막 임무’를 받아들였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죄송’의 마음을 털어낼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은 김경한 전 법무부 장관을 4월 22일 여의도에서 만났다.  


고향 안동에서 이어진 오랜 인연

존경하는 일송을 위한 ‘마지막 임무’ 


예상했던 검사의 눈빛이 아니었다. 32년간 검사로 살았다면, 분명 눈동자 안에 ‘칼’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온화하고 따사로운 ‘빛’이 있었다. 하루 내내 세상을 비추다 서쪽으로 지는 저녁노을, 그 은은하고 아름다운 빛. 그 까닭을 알고 싶었다. 


“안동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녔어요. 이후 대구, 서울 등지로 객지 생활을 했지요. 고향이 낙동강 상류 지역이라 추억이 많아요. 여름엔 수업 끝나자마자 강에서 멱 감고, 피라미 잡아 고무신에 가득 담아와 집에서 지져 먹고, 겨울엔 나무 조각과 철사, 노끈으로 스케이트 만들어 강 위를 씽씽 달리고…. 배가 고파 후줄근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친구들과 나란히 줄 서서 걸으며 군가를 불렀어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하면서요. 전쟁의 상흔이죠. 폭격으로 교사(校舍)가 무너져 풀 바닥에서 가마니 깔고 공부했던 기억도 선해요. 이렇게 고생하며 살았지만, 고향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네요.”


수구초심(首丘初心)일까. 소년에서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게 된 남자의 가슴에 저녁노을처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따사롭게 스며들었다.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둔 ‘마지막 임무’ 역시 고향과 맞닿아있었다. 


“일송 선생이 고향 안동 분이라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많이 전해 듣고 존경해왔어요. 특히 선생의 고향인 내앞마을과 우리 외내마을이 몇십 리 떨어져 있었는데, 두 문중이 혼인으로 이어진 밀접한 관계인데다 조부가 일송 선생이 세우신 협동학교 1회 졸업생이었어요. 일송 선생에게 배워 인연이 깊었지요. 마침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든다기에 내심 다행이다 싶었는데, 회장직을 맡아달라 해서 사실 고민이 많았어요. 부족한 점이 많아 여러 번 사양하다, 평소 존경해왔던 분이라 사명감으로 사업을 추진해보려 마음먹었지요.”


그리하여 일송 선생(1878년 6월 23일~1937년 4월 13일)이 마포형무소에서 순국한 지 85년 만에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그는 회장으로 ‘제3의 인생’ 혹은 ‘마지막 임무’를 시작했다. 


좌우 이념 초월해 민족통합의 한길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발족


지난 4월 13일 서울 효창공원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발족식에는 이종찬 우당기념관장(전 국정원장),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회장 등과 김문생(손자)·김복생(손녀)·이신자(손부) 등 일송 선생의 유족들 그리고 독립유공자 후손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일송 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우뚝한 지도자 중 한 분이시지요. 1878년 경북 안동 내앞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구한말 일찍이 서양 문물에 눈떠서 1907년 3년제 종합학교인 협동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에게 신식교육을 했어요. 굉장히 앞서간 분이시지요. 그 후 1910년 국권을 상실했을 때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 수십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어요. 만주에서의 활동은 그야말로 눈물겨워요.”


그는 준비한 서류를 천천히 읽으며, 역사 속에서 잊힌 영웅을 자랑스럽게 세상 밖으로 꺼냈다. 차근차근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일송 선생의 자료를 모아놓은 두꺼운 서류뭉치에서 그의 열심과 진심이 엿보였다. 


일송 선생은 삭막한 만주 땅에서 백서농장을 개척해 낮에는 밭 갈고 저녁에는 군사훈련을 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펼쳐나갔다. 최대 3만 명의 독립군을 수십 년간 유지했고 청산리 전투 등 대규모 대일 전쟁을 벌여 승리의 기틀을 닦고 지원을 했다. 


무엇보다 선생은 좌우 모든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지도자로 여겼던 거의 유일의 걸출한 위인이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4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던 1923년 상해 ‘국민대표대회’에서 선생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의장은 민족주의 계열의 안창호와 사회주의 계열의 윤해였다.


“만주 독립운동을 펼치며 여러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는 게 급선무다 해서 통합에 온갖 정열을 바치셨어요. 어떤 자리도 탐하지 않았던 선생이 늘 지도자였던 이유는 초지일관 민족통합에 노력을 기울인 점,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을 주창했던 노선의 일관성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일송 선생은 1922년 8월 남만주의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여 대한통의부를 결성했을 때도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삼부로 나뉘자 선생은 기득권을 버리고 삼부 통합에 앞장섰다. 여러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한 민족유일당 대표를 맡았고, 김좌진 등의 신민부와 아나키스트들이 연합한 한족총연합회 회장에도 선출되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을 모두 아우른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가가 바로 일송 선생이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세계 강국으로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분열과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일송 선생의 통합 정신이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또 우크라이나 사태나 주변 정세를 보면서 튼튼한 안보와 국방만이 국가를 지켜낼 수 있는 핵심 요소라는 사실이 와닿는데, 일송 선생의 무장투쟁 정신 역시 시대에 맞게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일송 김동삼 선생의 활동을 재조명하고 ‘일송 정신’을 되살려내기 위해 전심(全心)을 다할 계획이다. 전기 발간, 정기 학술대회, 만주 유적지 답사, 유가족 돕기 사업 등을 통해 일송의 발자취와 정신을 널리 알려가고, 장기적으론 젊은 세대 대상의 아카데미 설립, 내앞마을 생가터 복원, 기념물 등 상징물 건립 등을 차근차근 실행해나갈 계획이다.


‘원칙과 정도’ 향한 32년간의 분투

‘선한 검사’로 제2의 인생길 걷다


김경한 회장은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대를 거쳐 1970년 제1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 후 대구지방검찰청을 시작으로 32년간 시종일관 검사로 살았다. 지장(智將)과 덕장(德將)으로 존경받았다.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장, 기획관리실장, 법무부 차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등 검찰과 법무부에서 두루 요직을 맡으며 법무부 장관까지 올랐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배들에게 ‘원칙과 정도’를 강조했어요. 원칙과 정도는 모든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는 잣대와 같아요. 특히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올바르고 일관적인 잣대로 해야 해요.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면 당장 편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문제가 드러나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많거든요. 원칙과 정도는 문제를 가장 확실하게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길이며 후회를 남기지 않는 길이지요. 우리나라에서 법치주의와 법질서 확립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요.”


틈만 나면 전국을 돌며 ‘법질서 운동’을 펼쳐 ‘미스터 법질서’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지장(智將)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덕장(德將)으로의 활동은 사회공헌으로 이어졌다. 그에겐 제2의 인생이었다. 성라자로마을 나환자 돕기에 참여했으며, 영등포교도소(현 서울 남부구치소) 교정위원을 자원해 매달 교도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인생 상담을 했다. 공직에서 떠난 후엔 본격적으로 재능기부의 길을 걸었다. 


“10년 전 장관직을 그만두고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까 고민했어요. 어차피 30년 이상 범죄로 밥벌이를 해왔으니 주특기를 살리는 길밖에 없다 싶더라고요. 지난 시절 검찰에서 일할 때는 범죄자 한 명을 더 잡아넣는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퇴직 후엔 어떻게 하면 범죄자 한 명이라도 더 줄일까 하는 쪽으로 생각의 중심이 바뀌었어요. 이런 일을 하는 조직과 운동에 깊이 관여하다 보니 발목이 빠져서 어느덧 전업이 되고 말았지요. 하하.” 


‘안동 하회탈’을 닮은 그의 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는 2014년부터 8년간 한국범죄예방재단 이사장 맡아 ‘선한 검사’의 역할에 충실했다. 정기적으로 재소자와 우범자들을 찾아가 인간적인 대화도 나누고, 운동과 노래도 함께하고, 소년원이나 교도소에 좋은 책도 보내고, 매년 학술행사 개최, 전문잡지 발간 등등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지난 2월 8년간의 인연을 내려놓고 후임자에게 물려줬다. 팔순을 앞두고서야 난생처음 ‘자유인’이 된 셈이다.


“전문대 졸업한 스물세 살 장기수를 매달 면담했었어요. 나중엔 내가 영세 대부가 되어 세례도 받았지요. 그는 열심히 살았어요.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데 감방에 피아노가 없으니 종이에 건반을 그려서 밤마다 독학으로 연습했어요. 결국 교도소 내 성당 미사 때 피아노 반주를 했지요. 훗날 우량수가 되어 1년 남기고 가석방돼서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겨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어요. 지금도 ‘대부님, 대부님’ 하면서 연락이 와요. 보람 있는 추억으로 남아있답니다.”


그는 요즘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대해 선배로서 한마디 덧붙였다.


“검찰은 해방 이후 70년 넘도록 법적 전문성을 갖춘 수사기관으로 중대범죄 응징에서 나름 중대한 역할을 해왔어요. 검찰개혁을 한다면 지난날 허물로 지적된 부분을 유능한 외과 의사가 환부만 도려내듯 잘 가려서 도려내면 족하지 않나 싶어요. 조급히 처리할 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경찰이나 다른 기관이 맡는다고 공정성이 더 나아진다는 근거도 없고, 오히려 사건처리 지연으로 국민 피해만 커질 뿐이지요.”


이어 오는 5월 취임하는 윤석열 신임 대통령에게 “강력한 추진력에 보태서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정신을 보완하면 더 성공적인 대통령이 될 거라 생각한다”는 말을 전했다. 상선약수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돌아보니, 세월이 참 빠르다 싶어요. 어, 하는 사이 팔순이네요. 공직에서 물러나고 8년간 해왔던 한국범죄방지재단 일도 내려놓고 나니 세상사에서 벗어난 홀가분함을 느껴요. 참 오랫동안 일을 한 셈이지요. 이제 가족, 이웃과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유유자적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 마지막 일거리로 일송선생기념사업회 일을 맡았으니 정성을 다 기울일 생각이에요.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5월에 그동안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글들을 엮어 책이 나온단다. 제목이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문득 피천득의 시가 떠오른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마지막 임무에 머문 그의 세월에 녹음이 우거지길, 일송의 정신이 우리 사회를 태양처럼 밝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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