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초대석

[2022/07] 장호권 제22대 광복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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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나라, 진정한 국민통합의 시대를 꿈꾸며 


광복회는 대한민국 정신의 구심점

민족의 뿌리 지키고 국가 미래 밝혀야


글·사진 | 편집부 


  아버지의 ‘빛’은 거대하고 찬란했지만, 그만큼의 ‘그림자’가 아들의 삶 위로 드리워졌다. ‘장준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평생 멍에요 굴레였다.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잇고자 고군분투했으나, 시대가 암울했고 현실의 벽은 높았다. 아버지는 거대한 산(山)이었다. 그러함에도 우공이산(愚公移山)을 포기하지 않았다. 27년간의 해외 도피 생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난 속에서도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자존심과 책무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앞만 보고’ 살아왔다. 유불리, 이해타산을 따지는 일엔 아버지를 닮아 서툰 아들은, 광복회의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책무’를 떠올렸으리라. 지난 5월 31일 치러진 광복회 보궐선거에서 22대 회장으로 선출된 장호권 회장을 6월 21일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광복회장 선출된 지 21일째, 휴일을 빼면 보름간 근무했군요.” 그러곤 씽긋 웃었다. 짙은 눈썹과 기개 넘치는 맑은 눈으로. 글이나 사진으로 접했던 ‘진중한’ 모습과 사뭇 달랐다. 2차원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온화한’ 내면이 3차원에서는 또렷이 보이는 듯했다. 세상과 사람을 향한, 조금 더 범위를 좁히면, 국가와 민족을 향한 사랑과 연민으로 읽혔다. 그는 2차원적 진중함과 3차원적 온화함을 오가며, 1시간 남짓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광복회가 바로 서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대화의 시작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광복회장직에 출마한 이유였다. 


“잘못된 운영으로 광복회의 권위와 위상이 땅바닥에 떨어져 자칫 잘못하면 정체성을 상실해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할 위기에 봉착해 있어요. ‘광복회가 바로 서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는 신념으로 회장 후보 출마를 결심했죠. 오직 광복회가 제대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우리는 그동안 정체성을 찾는 일에 부족함이 많았어요. 광복 70주년이 지난 지금도 광복회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광복회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안 했어요. 그저 국가에서 혜택받는 하나의 보훈단체로 존재했죠.”


그는 여러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광복회 본연의 모습’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먹고 살기 위한 실리적 방법도 중요하지만, 왜 광복회가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이유부터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민족은 특수한 민족이에요. 이민족에게 지배당했던 역사를 선열들이 희생으로 찾아놨잖아요. 그러면 후손인 우리가 그 역사를 지켜야 하는데 그동안 많이 미흡했어요. 국토를 잃은 민족에겐 찾을 기회가 있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회생의 기회가 없다잖아요. 둘로 쪼개진 작은 한반도에서 미래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고, 대한민국의 뿌리를 알려주는 일이 광복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광복회는 우리 국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1965년 창립된 광복회는 해방 후 굴곡진 현대사를 거쳐 오면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정치적 편향성 논란을 빚기도 했고, 사익을 위해 이용당하면서 상당히 힘든 세월을 견뎌왔다. 그러는 사이,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역사적 자부심은 점점 사라졌고 국민적 신뢰도 잃어갔다. 그는 광복회가 대한민국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는, 광복회원의 명예와 자부심을 되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독립운동하신 선열들께서 ‘내가 죽으면 나중에 광복된 나라에서 후손들에게 돈 많이 주겠지’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오로지 나라를 찾겠다는 신념으로 싸웠지, 후손들 걱정하며 독립운동하신 분들은 없다고 봐요. 해방 후 온전한 자주독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이 소외계층으로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훌륭한 조상들이 있으니 자존심을 세우고 살아야 해요. 아무리 옆길로 갔어도 ‘돌아온 탕자’처럼 독립운동가의 DNA를 인지하고 교육하면 돌아온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이 힘들겠지만, 제가 중간에서 그 역할을 하려고 해요. 우리 내부에서 역사적 의미와 의무감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게 만드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앞만 보고 전진할 뿐


장호권 회장은 무분별한 폭로전으로 이어지는 광복회 관련 뉴스를 접할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내홍을 크게 겪고 회원뿐 아니라 내부직원, 국민까지 광복회를 우려하고 걱정하는 상황은 함께 힘을 모으면 해결할 수 있다. 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한민족이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정신적 구심점이 돼야 할 광복회가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에 나오면 국민 실망은 둘째치고 일본은 얼마나 좋아할까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저렇게 썩었잖아’ 하면서 민족정신이 뭉친 단체가 무너졌다고, 한국의 민족정기가 없어졌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할 테죠. 그렇게 친일파 세상이 되지 않을까, 가장 두려운 부분이에요.” 


그는 지난해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 홈페이지 지도에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해 국민의 공분을 샀을 당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 천왕은 서신을 받으라’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민족적 양심’에 입각해, 일본의 구심점인 천황을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이게 당신의 뜻이냐, 군국주의자 정치인들의 뜻이냐. 분명히 해라”라고. 그는 앞으로 이러한 역할을 ‘대한민국의 정신적 구심점’인 광복회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가장 강력하게 반일 감정을 표출해 온 사람인데, 이제 와 보니 일본과는 지리적으로 공생하고 공존할 수밖에 없는 관계예요. 100년 후 후손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미래 그림을 공유하는 게 중요하죠. 그렇게 나아가기 위해서 조건은 하나, 민족적 감정적 대립 관계를 해소해야 해요. 일본의 최고 지도자가 진중하게 한반도 침탈이 일차적인 잘못이었다고 사과해야 합니다. 감정적 대립으론 해결이 안 돼요. 이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요.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우면 공존이 힘들어져요. 정치 주도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주도권을 가지고 광복회가 그 역할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는 산적한 문제에 일일이 대응하기보다 광복회 본연의 존재 의미를 살려 정상화하는 일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많은 시간이 걸리고, 쉽게 성과가 나오지 않는 힘든 일임을 잘 안다. 주어진 시간도 1년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그 길이 옳은 길임을 알기에 그는 포기할 수 없다. 선열들이 독립이 어려운 현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것처럼. 


”이 짧은 시간에 오랫동안 누적된 구태와 적폐를 정리하려면 앞으로만 나아가야 해요. 부당함도 있고 부딪힘도 있지만, 일일이 대응하다 보면 거기에 매몰되어 환골탈태할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1년 후에 평가받으면 될 일이니, 지금은 묵묵히 앞만 보고 전진하려고요.”


‘하나의 심지’였던 아버지는 영원한 스승 


그는 ‘장준하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장준하의 아들로 살았다. 칠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아버지의 이름 석 자는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아버지가 만든 거대한 ‘빛’만큼의 ‘그림자’를 아들은 평생 짊어져야 했으리라. 


장준하 선생의 인생은 그야말로 ‘투사의 길’이었다. 24세에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6천 리를 걸어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가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1953년 종합교양지  『사상계』를 창간해 독재에 항거했다.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국회의원과 통일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 민주화 운동가로 명성 높았던 선생은 1975년 등산길에서 의문의 사고사를 당했다. 


그날 이후 아들은 27년간 해외 도피 생활을 하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난 속에서도 그는 ‘아버지를 욕보이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독립운동가의 책무를 떠올리며 아버지의 유지(遺旨)를 잇고자 고군분투했다. ‘아버지의 상징’과도 같은 『사상계』를 폐간 40년 만에 살려낸 것도 이 때문이다. 


“비록 2010년 한 해 동안 4번의 발행을 끝으로 정간했지만, 이후에라도 사상계를 복간시켜 이념의 잣대에서 벗어나 ‘따뜻한 진보와 아우를 줄 아는 보수’를 지향하며,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젊은이들에게 시대에 걸맞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싶어요. 오늘날 외세에 의한 분단극복과 민족의 평화통일에 기여하는 것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창간된 『사상계』는 굴곡진 현대사의 중심에서 독재와 정치부패를 비판하며 바른 세계관·인생관을 수립하려 몸부림친 당대 최고의 언론이었다. 1960년대 정기구독자가 1만 6천 명에 이를 정도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당시 지식인과 대학생의 필독서였다.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폐간처분을 받았다.


“사상계의 정신은 이승만 정권의 ‘신 국가보안법’ 날치기 통과에 항거해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으로 낸 ‘백지 권두언’(1959년 2월호)에서 잘 나타나듯,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저항정신이에요. 평생 수많은 상고를 겪으면서도 오직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아버지의 사상계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참여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어요. ‘일주명창(一炷明窓, 심지 하나가 온 방을 다 밝힌다)’ 정신이라 할 수 있죠.”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이자, 엄혹했던 시절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가로서 ‘하나의 심지,’ ‘하나의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칠순이 넘은 아들에게 영원한 스승이다. 


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위하여


“우리 사회는 지금 여러 지표를 통해 선진 사회로 진입했지만, 계층과 세대 간의 양극화 속에서 갈등하고 있어요. 우리 국민은 거짓된 진보와 보수이념, 지역주의로 분열되어 있어요. 선열의 뜻을 제대로 이어가야 할 책무가 있는 광복회장으로서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통일 조국을 위한 민족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해소하고, 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밝히고 싶어요.” 


국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한 현재, 그는 국민통합을 이루고 남과 북이 평화롭게 화합하는 한반도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독립운동 선열들의 뜻이며, 광복회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온 겨레가 손을 맞잡는 통일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광복회는 본연의 존재 의미가 있고, 또 저력이 있기에, 다시 국민의 존경과 기대를 회복할 것입니다. 선열들의 숭고한 유지를 현창(顯彰)하고, 대한민국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에서 탈출해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가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들과 결의를 다지면서, 또 포탄이 떨어지는 전란 중에 『사상계』를 창간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아들 장호권 회장 역시 그 뜻을 이어,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살겠다는 ‘하나의 심지’를 태우고 있다. 그 불꽃이 세상을 정의롭고 따뜻하게 비추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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