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 박민식 제32대 국가보훈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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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 위한 열정과 진심
보훈은 ‘국가의 책무’이자 ‘국가의 품격’
국민과 함께하는 생활 속 문화로 자리잡아야
글 | 편집부
사진 | 국가보훈처
신임 기관장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라 부를 만하다. 대전, 광주, 부산, 안동, 대구 등 전국 곳곳을 누비더니, 청와대 일일 해설자로 나섰다가 야구장에 나타났다가 미국 출장까지 그새 다녀왔다. 불과 취임 두 달 만에 이뤄진 행보라니, 믿기지 않는다. 지난 5월 13일 취임한 박민식 제32대 국가보훈처장이 그 주인공이다. 박 처장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해 전사했고, 어머니는 홀로 6남매를 어렵게 키웠다. 그는 부산 구포시장에서 ‘월남댁 아들’로 불렸다. ‘자긍심’이어야 했을 ‘보훈 가족’은 어린 그에게 ‘부끄러움’이었다. 학교 선생님이 원호대상자 손들라고 할 때마다 한없이 위축되곤 했다. 바야흐로 50년이 흘러 ‘월남댁 아들’은 보훈 가족을 책임지는 ‘국가보훈처장’이 되었다.
박민식 처장의 약속에 신뢰가 가는 까닭은, 취임 후의 발자취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시작으로 17개 보훈단체를 비롯한 유관기관 방문 일정을 소화했고, 6월 한 달은 현충일 추념식 등 호국보훈의 달 행사로 전국의 보훈 현장을 찾아가 소통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7월 들어서는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기 위해 7월 6일 ‘정책자문위원회’를 출범했고, 워싱턴D.C. 6.25 참전용사 ‘추모의 벽’ 준공식을 위해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이보다 바쁜 신임 기관장이 있을까.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위해 진심과 열정 다해 달려가는 그의 행보가 유독 돋보인다.
‘자긍심’ 느끼는 보훈 문화와 제도 만들어갈 것
박민식 처장은 서울대 외교학과 재학 중이던 1988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무부에서 일했다. 1993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 1996년부터 11년간 검사로 근무했다. 2008년 한나라당에서 거물급 중진 3선 현역 정형근 의원을 제치고 부산 북구·강서구갑 공천을 따낸 뒤 제18대 국회의원이 됐고 2012년 제19대 재선에 성공했다. 이러한 결과들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최고 엘리트 코스다. 하지만 화려한 이력서 뒷면에는 ‘보훈 가족’으로 살아온 힘든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다.

박 처장은 그동안 보훈(報勳)이 돕고 보살피는 ‘원호(援護)’의 개념에서 합당한 ‘보상’과 ‘예우’의 개념으로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도 여러모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보훈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자긍심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문화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오랜 소망이었기에, 이를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보훈 정책의 변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금 보훈이 ‘전환의 시점’에 있다고 생각해요. 포스트 코로나, MZ세대 부상 등 시대가 변했으니 보훈 정책도 함께 변해야 해요. 보훈이라고 하면 대부분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를 떠올려요. 하지만 이제는 ‘추모’도 문화로, 또 함께하는 축제로 바뀌어 가고 있어요. 보훈처도 바뀌어야 하고, 이미 여러 시도를 하고 있어요.”
지난 6월 국가보훈처는 한국야구위원회(KBO)와 ‘보훈, 야구를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국가유공자 시구 행사를 진행해 큰 호응을 얻었다. 국내 정상 패션 디자이너, 사진작가와 협업해 6·25전쟁 참전용사들께 사회적 존경심과 상징성을 담은 새로운 여름 제복 디자인을 개발해드리는 ‘제복의 영웅들’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 등 ‘제복의 영웅들’을 존경하는 보훈 문화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으면 해요. 특히 미래 세대에게 공감을 얻길 바랐는데, 누리꾼들이 ‘K-어벤져스’라는 별명도 붙여주셔서 무척 보람 있었어요. 앞으로 어렵고 엄숙하기만 한 보훈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문화로 체화될 수 있도록 스포츠·문화·패션 등 여러 분야에 보훈을 접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노력할 겁니다.”
‘다양한 경험’ 강점 살려 혁신과 협업 이룰 것
그는 역대 최초 정치인·법조인 출신 국가보훈처장이다. 그로 인해 보훈정책 전문성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다. 외무부, 사법부, 정계를 두루 거치며 쌓은 ‘다양한 경험’을 무기로 보훈처의 사업 영역을 보다 다각화하고, 다른 부처와의 협업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낼 계획이다.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켜준 22개 유엔 참전국과 195만 유엔 참전용사의 은혜에 보답하는 ‘보훈 외교’가 국가적 도리의 측면뿐 아니라 외교의 소재로써 국익을 신장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외무부 사무관 출신 이력이 보훈 외교에 도움이 되리라 봐요. 법률가로서의 강점을 살려 불합리한 보상 격차 등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국민의 눈높이에서 납득가지 않는 규정을 국민과 보훈 가족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바꿔볼 수 있고요. 14년간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국가보훈처를 담당하는 정무위원회 간사를 맡았었고, 보훈 관련 다수의 법안(제대군인 지원을 확대하는 법안 등)을 발의하는 등 꾸준히 보훈정책과 관련된 일을 해왔기에, 보훈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생각해요. 그간의 의정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국회의 협조가 필요한 사항들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해 나가려 합니다.”
갈등과 분열을 넘어 국민통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할 중요한 시기다. ‘호국영웅에 대한 예우가 국민통합의 시작’이라는 대통령의 말씀처럼 보훈이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본래의 역할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지난 7월 6일 사회 각계 전문가와 청년 국가유공자 및 유족들이 참여하는 ‘정책자문위원회’를 출범했다. 다양한 국민의 시각을 반영해 보훈이 나아갈 방향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하기 위함이다.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위원장을 맡았고, 보훈 당사자인 청년 국가유공자와 유족, 군인, 경찰을 비롯해 의사, 기업인, 언론인, 시사평론가, 작가, 예술인 등 44명이 위촉되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지원 무엇보다 중요
“저는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에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셨던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국가보훈처장으로서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와 지원에 부족한 점이 없는지 면밀하게 살피고, 개선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한 제도개선을 지속 추진하겠습니다.”

“민족 저항시인 윤동주 지사,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승리의 주역 홍범도 장군,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 의사 등 지금까지 호적이 없었던 순국선열 156분에 대한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정부 직권으로 최초로 추진합니다. 이분들은 ‘조선민사령’이 제정된 1912년 이전에 국외로 이주하거나, 광복 이전에 숨진 까닭에 대한민국의 공적 서류상 호적을 한 번도 갖지 못한 분들이에요. 대한민국 정부가 공부(公簿)상으로 이분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천명한 것으로,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의 상징적 조치라 할 수 있어요.”
특히 등록기준지(구 호적법 본적)를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이 살아 숨 쉬는 ‘독립기념관(독립기념관로 1)’으로 지정해 의미를 더했다. 오는 8월 독립기념관에서 창설 완료 행사와 특별전시를 개최, 광복절 앞두고 독립유공자의 애국을 되새기는 뜻깊은 계기가 될 전망이다. 중국 포털 바이두 백과사전에서 윤동주 지사가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국적을 중국, 민족을 조선족’이라고 표기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렇게 국가의 책무를 다함으로써 말도 안 되는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다양한 범국민적 기념사업(독립운동 유적지 순례, 학술대회, 사이버 독립운동 체험행사 등)을 추진하고 신진 연구인력 양성, 독립운동사 연구 컨트롤타워 기능 정립 등 독립운동사 연구기반을 확대한다. 공적심사위원회 전문성을 강화해 독립유공자 발굴 및 포상을 확대하고,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활 안정을 위한 생활지원금, 주거, 정착 지원도 강화할 계획이다.
‘일류보훈’ 위해 ‘보훈부 승격’ 충분히 검토해야
박 처장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위해 “보훈부 승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국가보훈처에 해당하는 ‘제대군인부’는 국방부 다음 두 번째 규모이고, 대통령이 신년 예산을 발표할 때 보훈 예산을 가장 먼저 발표해요. 보훈의 위상이 높은 것이죠. 반면, 우리나라는 국가보훈처장이 ‘장관급’이지만 정부조직법상 국무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부서권과 독자적인 부령 발령권이 없는 등 권한이 제약되어 있어요. 원활한 보훈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죠. 윤석열 대통령께서 ‘보훈과 국방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확고한 보훈 체계는 강한 국방력의 근간’이라며 보훈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하셨는데요, 이러한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을 국민에게 알리는 중요한 메시지로써 보훈부 승격을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72년 머나먼 이국땅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아버지는 평생 스승이었으며, 50년간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초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공 가도에서 승승장구했지만, 그의 인생 나침반은 부와 권력이 아닌 국가를 위한 헌신에 향해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아버지처럼, 국가를 위해 일하며 나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외무부 사무관, 검사, 정치인, 국가보훈처장으로 이어진 제 인생의 모든 이력은 그러한 소명 의식의 연장선에 있어요. 성공한 삶을 지향하기보다는 사회와 국가를 책임지는 삶을 원했고, 운 좋게도 그렇게 살아왔어요. 우연한 일로 명궁으로 오해받은 사람이 훗날 열심히 노력해서 진짜 명궁이 되었다는 옛날이야기처럼, 저 역시 주어진 자리의 무게를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제32대 국가보훈처장의 책임을 짊어진 그가 보훈 가족들의 가슴에는 ‘자긍심’을, 국민의 가슴에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심’을 명중시키는 ‘진짜 명궁’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