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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2/11] 왕산 허위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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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군 총대장 되어 2차 서울 진격 계획


죽는 순간까지 일제에 항거한 곧은 기개와 충절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허위는 13도 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 총대장이 되어 2차 진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 수십 명에 의해 양평군 서면 유동에서 체포되고 만다. 서울로 압송된 허위는 헌병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신문을 받았다. 허위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일제의 불법적 침략을 성토하였다.  

지난 20세기 초반,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되는 과정은 선열들의 피로 얼룩진 투쟁의 과정이었다. 그 눈물겨운 투쟁 가운데 하나가 의병연합부대인 ‘13도 창의군’의 1908년 한양 탈환 작전이다.

조선은 1896년 8월 전국을 13도로 개편했다. 강원도·경기도·황해도를 제외한 나머지 5개 도를 각각 남·북으로 나누는 이 개편으로 인해 온 조선을 망라하는 ‘13도 창의군’이란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다.

‘13도 창의군’은 대한제국 군대 출신 3,000여 명이 포함된 약 1만 규모의 대병력이었다. 이미 일본군 수중에 들어간 대한제국 내에서 1만 정도의 반일 병력이 결집하였고, 결집한 이들은 수도 한성 인근의 양주를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이들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진군했다.

당시 만여 명이 넘는 전국의 의병이 ‘13도 창의군’을 결성해서 을사늑약, 정미조약을 무효화하자며 서울 진공작전을 폈다. 또 국제법상 교전 단체 인정을 받기 위해 각국에 교신을 전달하였다. 우리의 의병이 무장폭력 단체가 아닌 구국을 위한 정당한 행위임을 세계에 알리려는 치밀한 행동이었다. 1908년 1월 28일, 음력으로는 1907년 12월 25일이었다.

이미 포고문을 통해 서울 진격을 예고한 ‘13도 창의군’은 서울로 진격했다. ‘서울진공작전’이라 불리는 이 작전 목표는 무력을 통한 수도 회복과 각국 공사관에 대한 국권 회복 호소였다. 이 작전을 지휘한 총대장은 이인영 의병장이었고 그 밑의 군사장이 오늘 우리가 만나 볼 허위 의병장이다. 허위는 누구인가?

13도 창의군 서울 진공작전 주도
이인영 후임 총대장 되어 2차 진격 계획

허위는 1854년 4월 1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아버지 진사 허조(許祚)와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허운으로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허위가 1904년 의정부 참찬에 제수되자 비서원 승(秘書院丞)에 추증되었고, 증조부 허돈(許暾)은 선산군 임은동 입향조로서 허위가 참찬에 제수된 뒤 장례원 좌장례(左掌禮)에 추증되었다.

1895년 을미왜변과 단발령에 반발해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허위는 그중 김산(김천)의병의 참모장으로 의병활동에 투신했다가 고종이 의병 해산 명령을 내리자 해산하였다. 그 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평리원 판사, 의정부 참찬, 비서원 승(秘書院丞)까지 역임한 고관 출신으로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 고종황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거치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 지위를 내려놓고 다시 의병활동에 나섰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김진묵(金溱默)·왕회종(王會鍾) 등이 먼저 경기도 삭녕군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허위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그는 두 의병장의 진영으로 가서 이에 호응했고, 군사(軍師)의 지위에 올라 작전의 계책을 세워 각 부장들에게 전달, 지휘했다.

그는 경기도 일대, 특히 적성 삭녕 안협 토산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400~500명의 의병을 확보하였다. 이후 그는 김규식과 연기우 이종협 황재호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를 끌어들임으로써 연합의진의 전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김규식과 연기우 등은 부교를 역임한 퇴역 하사관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해산군인 출신으로 군사 경험과 지식이 풍부했던 까닭에 소규모 의병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허위 의병부대에는 전투역량이 뛰어난 장교와 하사관 사병 등 해산군인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허위는 경기도에서 활동 중인 여러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계를 구축한 후 경기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점이 고려되어 그가 13도 창의대진소의 군사장으로 선임되어 서울 진공작전을 주도하였을 것이다.

이 사이 연천군에서 활약하던 9월 9일, 당시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허위가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순종에게 아뢰어 기존에 갖고 있던 정2품의 품계와 전직 참찬의 벼슬이 삭제되고 법부의 수배령이 공식적으로 내려지기도 했다.
그 후 주지하듯이 허위는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선봉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였으나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 총대장이 되어 2차 진격을 계획하였다. 

형집행 앞두고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아
53세에 유시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1908년 4월 21일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박정빈의 공동 명의로 전국 13도에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실제로는 허위가 이 통문의 발송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다른 의병장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무렵 그는 박노천 이기학 등을 통하여 통감부와 교섭하기 위하여 고종의 복위, 외교권의 반환, 통감부의 철수 등 30개 조의 요구조건을 제출하고 통감이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다시 서울을 공격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이 와중에 허위는 1908년 6월 11일 아침 일본 헌병 수십 명에 의해 양평군(지금의 포천) 서면 유동에서 체포되고 만다. 허위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체포에 응했다. 13년 의병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서울로 압송된 허위는 헌병사령관[明石元二郞]으로부터 직접 신문을 받았다. 허위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일제의 불법적 침략을 성토하였다.

일본은 말로는 한국 보호를 주창하지만 실상은 한국을 멸망시키려는 화심(禍心)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에 우리들이 좌시할 수 없어 목숨을 포기하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재판에서 일본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냐”고 물었다. 허위는 웃으면서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묻자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가 아니고 누구겠느냐”고 반문했다.
 1908년 10월 21일. 허위는 경성감옥의 교수대에 올라갔다. 경성감옥은 우리에게 서대문형무소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경성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그리고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뀐 그곳,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희생 당한 통한의 장소이다. 

 형집행에 마주한 허위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일본 승려가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했다. 그러자 허위는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

준엄히 말하며 승려를 물러가게 했다. 검사가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일갈했다.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 곧 사형이 집행됐다.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의 최후였다. 나이 53세에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남기고 순국했다.

國恥民辱 나라와 백성의 치욕이  
乃至於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不死何爲 죽지 않고 어찌하리오
父葬未成 부친의 장례도 치루지 못하였고
國權未復 국권도 아직 회복하지 못했으니
不忠不孝 불충 불효한 몸이
死何瞑目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그의 제자 박상진(朴尙鎭)이었다. 1884년에 태어난 박상진은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면서 신학문도 익힌 그는 졸업후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만주 지역의 망명자들을 만나러 갔다.

만주에는 허위의 형인 허겸을 비롯하여 이상룡과 김동삼, 손일민, 김대락 등이 망명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영남 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인물들이었다.

귀국 후에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총사령을 맡았다. 그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부호들과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으며 1918년 체포되어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인물이다. 

형제 및 친척 다수 독립운동에 헌신
직계혈통들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

허위의 순국 정신은 가문에도 이어져 그의 형제 및 친척 다수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직계혈통들이 해외로 뿔뿔이 흩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허위의 직계 자손들은 구 소련 및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 신분으로 어렵게 살다가 2006년 귀화하기도 하였다. 허위의 사촌형제의 손녀이자 독립운동가 이상룡의 손부인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에 수록된 이 집안 족보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허은이 쓴 이 책에 따르면, 장남 허학이 낳은 두 딸인 경놈과 로자는 소련에 살게 됐고, 차남 허영이 낳은 여섯 자녀 중 둘은 미국에 살게 됐다. 삼남 허준이 낳은 자녀들은 북한과 소련에 살게 됐다. 4남 허국의 두 딸은 클라라와 브르코프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4남의 두 딸 역시 소련에 살게 됐던 것이다. 

한편 허위에게는 위로 형이 셋 있었다. 방산 허훈(肪山 許薰)이 장형으로 나이 차가 스무살 쯤 났다고 하는데, 명망 있는 유학자이자 허위의 학문적 스승이기도 했다. 3천 석에 이르는 가산을 팔아 아우인 성산 허겸과 왕산 허위의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그 스스로도 청송군 진보의진의 의병장이 되었다.

방산 허훈의 장손자인 허종, 왕산 허위의 장자 허학도 만주와 러시아에서 독립운동 중에 순국하였고, 왕산 허위의 사촌인 범산 허형과 시산 허필도 국외망명하여 싸운 독립투사로 모두 만주에서 순국하였다.

이육사 시인의 어머니 허길 또한 허위 집안의 자손 가운데 눈여겨 볼만한 인물이다. 허위의 5촌 질녀로 범산 허형의 딸 허길은 안동의 퇴계 이황 집안에 출가해서 아들들을 두었는데, 그의 둘째 아들이 이원록이니 바로 독립운동가이면서 저항 시인인 이육사이다.

허위의 사촌 시산 허필의 아들인 허형식은 이육사에게는 5촌 당숙이 된다. 육사가 남긴 광야(廣野)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아마도 허형식일 거라고 사람들은 추측한다. 허형식이 치른 전투만 3백회, 27개 도시 점령, 일제군경 및 만주군 1,547명 사살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항일투쟁을 이어가던 중 1942년 8월 3일, 경성현 청풍령에서 만주군에 기습을 당하여 포위를 뚫지 못하고 싸우다 결국 전사하고 만다. 

허위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 후손 일가는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북한 등 곳곳에 흩어져 겪은 고초가 참혹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집안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조국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1911년까지 남한대토벌이 자행되는데 숨어있는 의병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양민들이 학살되고 그 숫자는 2만여 명이 된다. 이러한 만행은 지역 양민들에게 의병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어서 더 이상 의병들은 이 땅에서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고 만주로, 간도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독립군으로 다시 무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독립군은 다시 광복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선열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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