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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1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오동진(吳東振)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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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항일 투쟁으로 일관한 

독립군의 3대 맹장


글 | 편집부 


“나는 세계평화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독립군 사령이 되었다”고 말한 오동진 선생.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오동진 선생은 연인원 1만여 명이 넘는 부하를 이끌고 일제 관공서를 백여 차례 습격했고, 사상자는 900여 명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이런 전과로 그는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독립군 3대 맹장으로 불렸다. 


핵심공적

독립 무장 항쟁 단체의 사령장으로 부하를 이끌고 일제에 대한 공격을 감행, 혁혁한 전과를 올려 독립군 3대 맹장으로 불렸다.


주요약력

● 1889년  평안북도 의주 출생

● 1920년   광복군총영 총영장(중국 관전현), 

          대한통의부, 정의부, 고려학명당 군사위원장

● 1927년  장춘에서 피체(무기징역)

● 1944년  12월 1일   공주형무소에서 옥사,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3·1 운동 후 만주에서 광제청년단 조직


1889년 평안북도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에서 출생했다. 오동진 선생은 어릴 때부터 온후하고 정의심이 강했다.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온순한 사람이었으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기분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이 드문 소년이었다.


19살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지역 청소년의 교육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일신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인 유여대가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람으로 참여하면서 오동진 선생은 의주와 평양의 만세 운동에 동참했다. 의주와 서울을 중심으로 격렬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일제는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는데 오동진 선생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만주로 피신한 후 윤하진, 장덕진, 박태열 등의 사람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했고 대한독립청년단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중국 안동에 있는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안동교통사무국을 두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관할했다.


지역에 흩어진 조직들 통합해 

광복군총영을 만들다


당시 독립항쟁 조직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작은 조직으로 활동하면 활동 범위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 독립항쟁의 추진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 독립항쟁조직들은 통합을 위한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동진 선생은 인근 지역의 대한의용군사의회와 한족회, 기원독립단, 민국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등에 참여했다. 통합된 조직은 1920년 6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탁을 중심으로 독립항쟁을 위한 실질적 단체로 변모했다. 광복군사령부 사령관에 조맹선, 참모부장에 이탁, 경리부장에 조병준이 임명되고 오동진 선생은 총영장이 됐다.


일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미국 의회 동양 시찰단인 모리스의원 등 상원의원 일행이 8월 14일 서울에 온다는 정보를 얻었다. 광복군총영은 이 기회를 이용해 독립의지를 세계에 호소하고, 국내에 있는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김영철, 장덕진, 안경신 등 비밀 요원을 평양, 신의주, 선천, 서울로 보내 미 의원단 일행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일제 관청을 파괴하고 일제요인들을 사살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일제 관공서 습격 143회, 

밀정과 관리 등 900여 명 사살


오동진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이 제안하는 동삼성 내 독립항쟁단체 통합에 적극 찬성하고 양기탁, 김동삼, 현정경, 이상룡, 이탁 등과 광복군총영, 서로군정서, 한교민단, 광복단, 독립단대한청년연합회를 통합해 통군부를 만들었고, 2개월 후 대한통의부로 발전시켰다. 이듬해 6월 신팔균 사령장이 전사함에 따라 사령장을 겸직하고 소속 독립군을 총지휘하게 됐다.


1925년 1월 25일경에는 통의부의 고문인 양기탁 등과 통의부를 중심으로 길림주민회, 의성단, 대한독립단, 광정단동친목회, 변론자치회, 고본계, 대한독립군단, 학우회 등 지방자치단체를 총망라해, 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정의부를 조직했다. 산하 의용군 사령장에 오동진 선생이 겸무했는데 8개 중대에 무장한 7백여 명의 병력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에는 각계 인사들이 모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했다. 좌·우익이 힘을 합해 독립항쟁을 추진하기 위한 단체다. 당원 수는 1천 5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선생은 정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총사령을 겸임하고 일제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 기록에 따르면 1927년까지 부하 연인원 14,149명을 지휘하여 일제 관공서 습격 143회, 일제 관리 살상 149명, 밀정 등 살상 765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옛 동지의 배신으로 

신의주에서 잡히다


한창 일제에 대한 공격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을 무렵 옛 동지 김종원이 “삼성 금광주인 최창학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장춘 시내에 있던 약속장소로 나가보니 만나자는 사람은 없고 신의주경찰서의 고등계 형사인 김기덕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김종원이 배신하고 선생을 밀고했던 것이다.


일제에 잡힌 오동진 선생은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고 1929년 11월 11일부터 33일 동안 단식했다. 1932년 3월 5일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됐지만 미쳤다는 이유로 퇴장 당했고 오동진 선생이 없는 재판장에서 검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동진 선생은 더이상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항소를 포기했다.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오동진 선생은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간의 제2차 단식을 벌였다. 일본인 의사가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내려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는 공주형무소로 옮겨졌다. 일평생 일제에 대해 무장항쟁을 했던 오동진 선생은 해방이 되기  한 해 전인 1944년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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