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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12] 건국훈장 독립장│김도현(金道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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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회복의 염원을 

동해의 천길 물 속에 던지다


글 | 편집부 


“집집마다 칼을 갈고 사람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아 일제히 소리 질러 왜노(倭奴)들과 한번 싸워야 할 것이다. (중략) 지난날에 성취하지 못했던 일을 통탄하며 장래 광복할 것을 맹세하나니 금년 11월 7일 동지(冬至)에는 동해에서 죽어 왜적을 기어코 멸망케 할 것이다.”

-김도현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 중


핵심공적 

영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으며 영흥학원으로 지역 계몽운동을 펼쳤다.


주요약력

● 1852년   경상북도 영양 출생

● 1895년   영양 검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량산에서 모병 활동

● 1896년   안동 유시연 의진 등과 합세하여 안동부 공략, 경상북도 지역에서 을미의병 중 최장수 활동

● 1905년   상소 투쟁

● 1906년   삼남지역의 의병 활동 촉구

● 1909년   영흥학교 설립

● 1914년 12월 22일   동해 바다에 투신,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영양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김도현 선생은 1852년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의 기록은 불분명하다. 선생이 역사에 등장한 때는 1896년 1월이다. 1894년 갑오년에 안동에서 처음 의병이 일어났지만 다른 지역은 아직 조용할 때였다. 하지만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김도연 선생은 사촌동생 김한현으로부터 영양에서 백성들에게 단발을 강요한다는 일과 안동에서 의병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부터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나선 선생은 1월 23일 영양읍내에서 통문을 돌리고 이튿날 영양지역의 유력한 유생들과 의병에 대한 일을 논의했다. 그 자리에 모인 영양 유림은 안동과 예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의병을 일으키자고 의견을 모아 김도현 선생은 조영기와 안동으로 갔다.


안동의 안동의진과 예안의 선성의진을 둘러본 선생은 며칠 후 있을 대향회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안동의진이 패했다는 소식에 격분하여 바로 통문을 돌리고 의병을 조직하고자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중지하고 말았다. 그때의 영양 유림은 의병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의병 일으킨 후 예안 선성의병에 합류


주변의 만류에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던 김도현 선생은 1896년 2월 13일 안동의진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공급하던 류시연으로부터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이 청량산에 가보니 선성의진이 조직돼 있었다. 예안에서 수백 명의 사람과 물자를 모은 선생은 영양으로 돌아와 조승기를 창의장으로 추대해 의병을 일으켰고 선성의진으로부터 중군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아 선성의진에 합류했다.


선성의진은 태봉을 공격할 계획을 짰다. 상주에 있는 태봉은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일본군의 중요 병참선으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3월 29일 아침, 태봉공격이 펼쳐졌다. 첫 전투였기에 경험이 없고 무기도 열악하며 조직력도 부족했다. 의기만으로는 전투에서 이길 수 없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내부 갈등으로 선생은 의병장을 그만뒀지만 강릉의진에서 그를 불러 선봉장이 됐다. 강릉의진은 서울에서 온 관군과 대공산성에서 전투를 펼쳤으나 화력이 우세한 관군의 공격에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선생은 겨우 10명 남짓한 사람과 함께 영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을사늑약에 항거해 

의병 일으켰지만 여의치 않아


재기하려 했지만, 주변의 상황이 매우 급하게 돌아갔다. 선생은 인근 지역 의병들이 연이어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동의진과 김하락의진의 잔여 병력과 힘을 합쳐 영양의 관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의견이 맞지 않았다. 을미년에 일어난 의병은 대부분 해체되고 선생의 의병만 남아, 하는 수 없이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마침내 의병부대를 해산했다.


그 후 김도현 선생은 5읍도집강 자리에서 지역 치안 유지에 힘쓰고 있었다. 하지만 1905년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선생은 서울로 가서 조약이 무효라는 것과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요구를 담아 상소를 올리고, 각국 공사관에 ‘포고서양각국문’을 보냈다.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투쟁의 깃발을 올리며 다시 한 번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양군수 이범철의 요청에 따라 안동에서 진위대와 일본군이 몰려들어 의병의 군비로 쓰고자 했다는 죄목으로 재산을 압류하고 선생을 잡아갔다. 이러한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는 바람에 이범철 군수의 탐학 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났고,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때문에 선생이 붙잡혀 고생한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동짓날 아침 해 바라보며 

동해에서 생을 마감하다


광무황제가 각지에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를 내렸고 가까운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신돌석 의병을 비롯해 여러 의병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선생은 더이상 의병을 일으킬만한 여유가 없어 그 대신 각지에 의병을 일으키라고 설득하는 ‘의격고삼남각군문’를 지어 보냈다.


나라를 위한 다른 방안을 찾던 중 안동에서 신식학교인 협동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도 계몽운동에 앞장서기로 하고는 영흥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이 학교를 세울 때 친일파 윤필오와 일본군 헌병대장의 후원도 받아 선생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1910년 9월, 선생의 스승인 이만도가 단식으로 자결을 시도한다. 많은 사람이 이만도를 찾았다. 선생은 스승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이만도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된다며 말렸다. 선생은 뒷날 따라가겠다고 이야기한 후 이만도를 따라 자결한 사람들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고향에서 영흥학교를 꾸려가던 선생은 1914년 아버지의 상을 마치자 동해로 떠났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가족들이 뒤쫓아 왔으나 선생은 자신의 의지를 알렸다.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과 ‘절명시’를 남기고 김도현 선생은 떠오르는 동짓날 아침 해를 바라보며 동해 바다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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