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People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2/12] 유달산 묏마루에 태극기 높이 꽂은 김귀남 지사

페이지 정보

본문

정명여학교 재학 중 10여 명 학생들과 만세시위 펼쳐


솔바람 소리에 들여오는 앳된 여중생의 함성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김귀남 지사는 정명여학교에 재학 중 10여 명의 학생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시위를 펼치다가 일경에 잡혀 징역형(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만세시위로 정명여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서울 배화여학교에 편입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남편 서인식과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부터 온 

장문의 메일 편지 한 통 


지난(2019) 2월 28일 목요일, 필자는 한 여성독립운동가 후손으로부터 장문의 메일 편지 한 통을 받았다. 10년 동안 꼬박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후손으로부터 이렇게 긴 편지를 받은 적은 없던 터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자신을 김귀남(金貴南, 1904.11.17.~1990.1.13.) 지사의 외손녀인 문지연이라고 소개한 편지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느닷없는 메일로 놀라셨겠지만, 전부터 꼭 한번은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동안 좀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문지연 씨의 사연은 이러했다. 필자가 쓴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5권)에 실린 외할머니(김귀남 지사)를 위한 헌시와 독립운동 기록을 지난해서야 알게 되었고 이 책을 계기로 수년 만에 외할머니의 유품들을 다시 챙겨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동안 유품은 후손이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외할머니의 각종 유품들을 집에서 보관하고 있었지만, 말이 보관이지 사실상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은 하루하루 현실을 살아가는 일상에만 집중해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할머니의 유품들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는데 사실상 집안에 묵혀두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과의 협의 끝에 외할머니의 유품을 출신학교인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당시 정명여학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남편 서인식과 함께 항일운동 매진

부모의 걱정으로 청운의 꿈 접어


필자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김귀남 지사의 외손녀를 만나러 불광동 집으로 달려갔다. 불광동 집은 김귀남 지사가 9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던 집으로 집에는 사위 문영식(85세) 선생이 반갑게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모님(김귀남 지사)은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국방의 의무도 없는 어린 중학생들이 나라를 되찾겠다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장모님은 매우 과묵하셔서 당신이 독립운동하신 것을 주변에 잘 알리지 않았습니다. 서훈에 관한 것도 친일 정권하에서는 서훈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돌아가신 뒤에서야 서훈 신청을 해서 1995년(1990년 작고)에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었지요.”


김귀남 지사의 사위인 문영식 선생은 과거 장모님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외손녀가 정성껏 내온 딸기와 차 한 잔을 마시며 김귀남 지사의 사위인 문영식 선생과 대담이 이어졌다.


“장모님(김귀남 지사)은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정명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1년 11월 14일, 10여 명의 학생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시위를 펼치다가 일경에 잡혀 징역형(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지요. 만세시위로 정명여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서울로 올라와 사립학교인 배화여학교(4년제)에 편입하여 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일본 유학을 위해 다시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5년제)에 편입, 동교를 1년 만에 졸업하고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에 유학하였습니다. 한편 남편인 서인식이 유학 중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김귀남 지사도 이에 동조하여 다시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부모는 딸(김귀남 지사)의 안전을 위해 즉시 귀국시켜 가사에 종사케 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결국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지요.”


사위 문영식 선생의 장모님(김귀남 지사) 이야기는 구체적이고 자세했다. 김귀남 지사는 귀국 후에도 남편 서인식과 함께 일경에 쫓겨 다녔고, 광복 후에는 남편이 북쪽에 있는 형님을 만나러 떠난 뒤 귀가하지 못해 생이별의 생활을 이어 가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여학교와 일본유학(동지사대학 유학 기록은 확인 못한 상태)을 한 김귀남 지사는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갖추었고, 독서와 음악 감상을 즐겼으며, 수예에 능하였다고 했다. 여학교 때의 졸업장과 상장, 졸업앨범과 관련된 학생시절의 유품과 손수 수놓은 수예품 등은 후손들이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에 기증했다.


목포정명여자중학교 천장에서 

한 보따리 쏟아져 나온 독립운동 자료


필자는 김귀남 지사의 외손녀와 기증된 외할머니의 유품을 보기 위해 2019년 4월 3일 수요일,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를 찾았다. 학교 정문에 도착하니 교문에는 4·8만세운동 100주년 ‘제19회 4·8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라는 글귀가 적힌 펼침막이 높이 걸려있었다. 교문 옆에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세운 ‘정명여학교 3·1운동 만세 시위지·학생운동지’라는 커다란 선 간판이 놓여 있어 당시 목포지역 만세운동의 열기를 느끼게 했다.


박형종 교장 선생님은 “우리 학교는 1919년 4월 8일 만세운동과 1921년 11월 14일, 그리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때에 대대적인 학생들의 참여가 있었습니다. 특히 1983년 2월, 중학교 교실 보수작업 시에 천장에서 한 뭉치의 독립운동자료가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지요. 그 자료들은 기념관에 모두 전시중입니다”라고 했다.


천장에서 한 보따리 쏟아져 나온 독립운동 자료 속 인물 가운데 곽희주, 김나열, 김옥실, 박복술, 박음전, 이남순, 주유금 지사는 201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한 학교에서 7명이 한꺼번에 서훈을 받은 일은 드문 일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앞서 서훈을 받은 이가 바로 김귀남 (1995년 대통령표창) 지사다. 김귀남 지사는 1921년 11월 14일, 워싱턴 군비감축회의에서 거론될 한국 독립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천귀례, 곽희주 등 10여 명의 학생들과 사립영흥학교 학생들이 힘을 합쳐 함께 만세시위를 펼치다가 일경에 잡혀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 ‘100주년기념관’에 기증된 김귀남 지사의 유품은 사립배화여학교 시절의 졸업증서와 우등상장,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 시절의 상장과 졸업증서는 물론이고 만세운동으로 퇴학당해 졸업장이 없는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 제1호 명예졸업장(2001년), 그리고 손수 한 땀 한 땀 수놓은 수예품 등으로 굴곡진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다.


100년 전 어린 여학생들 함성이 

솔바람 소리 속에 들리는 듯


목포지역 여학생들의 만세운동 중심지였던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의 ‘100주년기념관’을 나와 김귀남 지사가 잠들어 계신 영암(전남 영암읍 농덕리 산 4-2번지) 선영에 들렸다. 무덤은 월출산이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김귀남 지사의 경우 국립현충원에 모실 수 있지만 한 점 혈육인 따님과 헤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사위인 문영식 선생 등 문중에서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고 했다.


김귀남 지사 무덤 표지석 바로 곁에는 필자가 김귀남 지사를 위해 쓴 헌시(獻詩) <유달산 묏마루에 태극기 높이 꽂은 ‘김귀남’>이 까만 빗돌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선산을 내려오면서 솔숲 사이로 불어오던 바람 한 자락이 볼을 스쳤다. 100년 전 목포정명여학교의 어린 여학생들의 함성이 솔바람 소리 속에 들리는 듯했다. 그 한가운데 김귀남 지사가 있었다. 


필자 이윤옥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