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3/01] 건국훈장 독립장│노응규(盧應奎)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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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에서 올린 의병의 기치
구국의 대의를 역설하다
글 | 편집부
“나라에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있으되 임금이 토벌하지 못하고 방백이 토벌하지 못할 경우에는 비록 미천한 선비라도 토벌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니, 대개 적을 토벌하는 대의가 임금의 명령을 받는 것보다 더 급하기 때문입니다.”
- 1897년 10월 올린 선생의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 중에서
핵심공적
1896년 경상남도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점령하고 1906년 충북 황간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는 등 항일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주요약력
● 1861년 3월 15일 경상남도 안의 출생
● 1896년 경상남도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점령
● 1906년 충북 황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 척후대 및 일제 시설물 공격
● 1907년 1월 4일 경성 경무 감옥에서 옥사, 순국
●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경상남도 안의에서 거의, 진주성 점령

노응규 선생은 1861년 3월 15일 경상남도 안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특히 김해 부사를 역임한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했다. 1876년 개항 이후 일제와 외세가 물밀듯이 밀려와 내정 간섭과 경제적 침탈하는 것을 보면서 우국충정의 마음을 키웠다.
30세 전후에 위정척사론 거두인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면암 최익현을 찾아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위정척사 사상과 성리학적 민족의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또 연재 송병선과 입재 송근수 문하에 드나들면서 학문을 연마했다.
1895년 10월 일제는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뒤이어 을미개혁의 하나로 단발령을 강제 시행했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국모의 원수를 갚고, 국왕을 보위하며,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1896년 2월 19일 경상남도 안의에서 서재기, 정도현, 박준필, 최두원, 최두연, 임경희, 성경호 등의 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곧바로 경상남도의 행정 중심지이자 요충지인 진주로 진격해 새벽에 진주성을 탈환했다. 선생의 의병이 진주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진주부민들 또한 봉기해 정한용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성 밖에 진을 쳤다.
일제의 침략 거점인 부산 개항장 공략 개시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의병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해 진주의병진의 규모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노응규 선생을 총대장으로 하는 진주의병진은 진주성을 거점으로 삼아 인근의 여러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선생은 2월 27일 선봉장 서재기를 파견하여 단성을 장악하게 하였고, 뒤이어 하동, 고성, 함안 등으로 세력을 뻗쳤다. 대구로 도망가 있던 경무관 김세진이 대구진위대 병사들과 일본군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이를 두 차례에 걸쳐 격퇴했다. 진주의병진은 일제 침략의 거점인 부산 개항장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부산 공략을 위해 먼저 부산 옆의 김해를 장악했다.
4월 11일 김해에서 구포로 건너가는 선암 나루터에 집결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김해로 귀환하기로 했다. 다음날 일본군 수비대가 증원군을 파견해 공격해 오자 창원 방면으로 일시 퇴각했다가 김해에서 구포로 돌아가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적군 4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진주의병진도 4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어 부산진공 계획을 포기하고 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망할 뻔한 가문을 살리고 관료로 활동
4월 중순 다른 의병들이 타지에 나가 있는 사이에 진주성이 공격받게 된다. 진주성에는 선생과 불과 50~60명의 의병이 있었을 뿐이었다. 4월 24일 밤 700여 명의 적군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자 선생은 병력을 이끌고 성을 탈출해 삼가에 주둔하던 정한용 의진으로 갔다.

그러나 선생이 삼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한용은 의진을 해산했고, 안의에 있던 서재기마저 살해되자 선생도 의병을 해산하고 새로운 항전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노응규 선생의 부친과 형이 살해되고 가산이 몰수되는 등 멸문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이를 피해 각지를 전전하던 선생은 학부대신 신기선과 법부대신 조병식의 주선으로 궐내에 들어가 상소를 올렸다. 상소는 광무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사면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안의의 서리들은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선생의 귀향과 아버지와 형의 장례도 막았다.
게다가 노응규 선생까지 살해하려 하자 조병식, 이유인, 민영준 등의 협조로 왕명을 받아 1898년 4월 부형을 살해한 안의의 서리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후 선생은 합천 청계에 머물면서 흩어진 가족을 모아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규장각 주사에 임명돼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뒤 경상남도 사검 겸 독쇄관, 중추원 의관, 동궁 시종관 등을 역임했다.
충북 황간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하자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자 했다. 광무황제는 선생에게 비밀리 시찰사의 부인(符印)과 암행어사 마패를 하사해 거의를 독려했다.
노응규 선생은 스승인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했다. 최익현 의진은 태인읍을 점령한 뒤 정읍과 순창을 공략했다. 하지만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 의병장을 비롯한 13명의 의병지도부가 잡혀 의진이 해산되고 말았다.
선생은 경상남도 창녕으로 피신했고 1906년 늦가을 충북 황간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황간의진은 경부철도와 열차, 그밖에 일제 시설물 등을 파괴해 전과를 올렸다.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 척후대를 괴멸시켰다.
그러나 일본군 밀정에 의해 지도부의 위치가 발각돼 1906년 12월 8일 선생을 비롯한 서은구, 엄해윤, 김보운, 오자홍 등 의병지도부가 충북경무서 황간분파소 소속 순검들에게 잡혀 의병부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선생은 경무청 감옥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항일 구국의 대의를 역설하다가 1907년 1월 4일 4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