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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3/01] 건국훈장 대통령장│편강렬(片康烈)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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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거든 나라 찾기 전에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


글 | 편집부 


“양양한 압록강수는 밤낮으로 흘러가는 곳 어디메뇨 유유한 나의심사 너를 따라 거지 없다” 젊을 때 의병에 투신한 편강렬 선생은 평생을 항일 운동에 매진하다 결국 일제에 잡혔고 고문으로 생긴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에 직면하고도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았다. 


핵심공적

의병으로 항일활동을 시작하여 의성단을 조직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했다.


주요약력

●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 출생

● 1907년   이강년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

● 1919년   황해도에서 군사주비단을 조직

● 1923년   의성단 단장으로 의열투쟁 전개

● 1928년 1월 16일  신의주 감옥에서 옥사,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약관의 나이에 의병활동, 

서울 진공작전 참가


편강렬 의사는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토왜복수를 외치며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의사는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해 경상·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1908년에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하게 되자 의사는 군사장 허위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평양의 숭실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10년 한일병합이 강제 체결되자 다시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한 의사는 황해도 지회에서 은밀한 활동을 벌인다. 그때 일제가 날조한 ‘사내(寺內)총독암살모의사건’에 연루되어 무죄 석방을 받을 때까지 2년여 동안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영남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항일활동을 벌였다.


의성단 조직, 만주벌 항일무장투쟁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편강렬 의사는 동료들과 함께 이 지방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심한 감시 때문에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못하였고 3월 15일 이후에야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할 수 있었다.


3.1 독립운동 이후 의사는 동생인 편덕렬을 상해의 임시정부에 파견했고, 같은 해 가을에는 안악에서 최명식, 간병제 등과 군사주비단을 조직해 안악군 대표를 맡았다. 군사주비단 ‘군립군의 국내 진입 시 원조를 목표’로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어느 매국노의 밀고로 이 사실이 일경에게 알려지게 된다. 황해도 경찰부에서는 각 군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체포해 1919년 9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의 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쇠약한 몸으로 출옥한 의사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점포는 채권자에게 탈취당한 뒤인지라 미련 없이 중국으로 떠났다. 북경과 상해에서 옛 동료들과 조국광복의 방법을 논의한 끝에 무장항쟁이 최선의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만주에 정착했다.


의성단을 조직해 

창춘성 내 일본 영사관 습격


그 후 1923년 10월경 산해관에서 강진지, 양기탁, 남정 등과 의성단을 조직한 의사는 단장에 추대됐다. 1924년 의사는 단원들과 함께 창춘성내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 명을 살상하는 큰 성과를 거뒀으며 대낮에 봉천(현재의 심양) 시내 만철병원을 습격해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총독부는 크게 당황해 만주에 있던 경찰력과 밀정들을 총동원하고 총독부 사무관이던 홍모(洪某)를 특파하여 의사를 체포코자 했으나 의사는 장춘 시내에 ‘아사홍생 아생홍사(我死洪生 我生洪死 : 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 내기다)’라는 야유 섞인 벽보를 붙였다.


1924년 의사는 만주지역에 독립항쟁단체들이 수없이 난립하여 그 실행방법과 활동방법이 달라 일반 동포들이 오히려 많은 곤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독립항쟁전선에 약화를 가져온다 생각하고 통합운동을 추진했다.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의를 개최해 서로군정서, 길림주민회, 광정단, 대한독립단, 통의부, 노동친목회 등의 대표들과 함께 독립군 조직의 통합을 논의했다. 이 회의는 김동삼 선생을 의장으로 선출한 후 협의를 거듭한 끝에 정의부를 결성했다.


고문과 옥고로 큰 별이 지다


8월에는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전가전(傳家甸)으로 가서 군자금 4~5백 원을 모집하고 하얼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독립항쟁단체의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를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비상소집되어 하얼빈에서 포위를 당했고 장시간의 총격전 끝에 마침내 일본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다.


1924년 8월 22일 신의주로 압송된 의사는 1925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되었는데 판결이 있은 후 의사는 크게 웃으며 의연하게 돌아서 재판장을 떠나 사람들이 의사의 호기를 놀라워했다.


그 후 2년 이상을 신의주 감옥에서 고문과 옥고로 시달린 의사가 피골이 상접해 죽기 직전인 상태가 되자 일제 법원은 1926년 9월 28일 병보석으로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입원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골병에 이른  몸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족과 친지들은 의료시설이 갖춰진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했으나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1928년 1월 16일 마침내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일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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