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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3/01]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김시명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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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위하는 일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 


“우리는 만주를 회복할 수 있었다”

국외 독립운동사 왜곡 많아, 진실 밝힐 것


글·사진 | 편집부 


김시명 명예회장은 안동 길안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필락 선생의 증손이다. 중학교도 포기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삶의 고비를 넘고 또 넘어 중소기업 경영인으로 성공했다. 여유가 생기니 조상 생각이 났다. “증조부와 조부는 왜 나라에 목숨을 바쳤을까?” 이유라도 알아봐야겠다 싶어 순국선열유족회를 찾았다. 현실은 참담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은 허울 좋은 구호뿐이었고, 순국선열에 대한 비정상과 불공정은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다. 개인적 ‘호기심’은 불의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고, 분노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관련 기관을 찾아가 따져 물었고, 공무원과 국회의원을 수없이 만났다. 팸플릿과 책자를 펴내고 헌법소원도 제기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립운동 역사 역시 많은 부분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재건축』이란 단행본 발간을 앞둔 김시명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명예회장을 12월 16일 광진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수백 권의 책이 쌓여 있는 사무실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 백발을 멋스럽게 넘긴 노신사가 선뜻 악수를 청했다. 따뜻한 손과 강직한 눈빛에서 오랜 열정이 전해졌다. 넥타이에 새겨진 무궁화 자수가 가슴 한가운데서 아름답게 빛났다. 독립운동가 후손의 자부심과 나라 사랑의 굳은 결의인 듯 보였다.


선열들은 왜 나라에 목숨을 바쳤을까?


김시명 회장은 경북 안동 임하면 출신으로 길안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필락 선생(1873~1919, 건국훈장 애국장)의 증손이다. 3·1운동을 주도한 증조부는 총살당했고 조부는 일본 경찰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받다가 서른셋에 세상을 떠났다. 가진 땅은 일제가 죄다 빼앗아갔다. 독립운동의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포기했지만, 다행히 안동중학교 길안분교가 생겨 극빈자 대우를 받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안동농림고등학교 논 1만 5천 평을 3년간 농사지으면서 등록금을 면제받았고, 건국대학교 축산과에 합격해 4년간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지원받아 공부했다.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골프연습장 자동화 기계를 개발해 100여 건의 특허를 출원했고, 15건의 세계특허도 획득했다. 이 기계가 삼성그룹의 인정을 받아 경제적 기반도 마련했다. 먹고사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가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예순을 넘어서니 주변을 돌아볼 정신적 여유도 생겼다.


“사람이 장차 죽으면 지하에 가서 먼저 가신 조상님께 신고해야 한다는데, 나라에 목숨을 바친 두 분께 가서 ‘저는 애들 잘 먹여 살리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신고하기는 좀 싫었어요. 도대체 증조부와 조부는 왜 나라에 목숨을 바쳤을지, 그 이유라도 좀 알아봐야겠다 싶어 전화번호부를 뒤져보니 ‘순국선열유족회’가 있었어요.”


그렇게 소소한 호기심에서 유족회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순국선열유족회라면 전국적인 단체이고, 국가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을 줄 알았다. 불행히도 실상은 정반대였고, 그는 “순하디순한 수많은 순국선열 후손들 가운데 국가정책을 비판하는 돌출분자”로 변해 갔다. 


순국선열은 왜 사회에서 소외되었나?


유족회 이사를 맡아 현장을 직접 뛰어다녀보니 가는 곳마다 첩첩산중이었다. 이름도 없이 조국 독립에 목숨 바친 15만 순국선열의 영혼을 위로하는 순국선열의 날 추모제인데, 정부에서 지원 하나 없었다. 순국선열의 정신 선양과 후손들의 생활보호를 목적으로 순국선열애국지사기금을 마련했지만, 정작 순국선열은 혜택을 받지 못했다. “뭐 나라가 이렇지?” 싶어 관련 기관을 찾아가 따져 묻고, 공무원과 국회의원을 수없이 만났다. 


“처음에는 광복회가 순국선열을 대표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 거예요. 순국선열 후손이 애국지사 후손보다 2배나 많은데도 광복회 회원 90%가 살아 돌아온 애국지사 후손이고, 순국선열 후손은 10%밖에 안 돼요. 순국선열애국지사기금 97%는 애국지사 후손들 지원에 편중되어 있고요. 그래서 광복회가 독립운동을 대표할 수 없다고 선언했죠.” 


2014년 4월 회장직을 맡은 이후엔 더 맹렬하게 싸워갔다. 공문을 묶어 『현대판 상소』라는 책을 만들었고 국회의원, 장관,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등이 주관하는 1천여 행사를 따라다니며 애국지사보다는 순국선열을 우선해야 한다는 팸플릿을 보내기도 했다. 또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순국선열에 대한 부당한 예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나라의 국가 최고 의전 시설이 국립서울현충원이잖아요. 국가 최고 의전 대상은 현실적으로는 대통령, 정신적으론 순국선열이에요. 국가 최고 의전 시설에 국가 최고 의전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순국선열 묘역이 없어요. 애국지사 묘역, 임시정부 요인 묘역만 있죠. 그 부당함을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니 마지못해 ‘애국지사 묘역’을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간판만 바꿨더라고요.”


‘이만하면 됐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분노를 거두지 않았다. 순국선열에 대한 부당한 예우를 온전하게 바로잡기까지 분노를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그가 2019년 3월 1일 새벽 순국선열회장직을 돌연 사퇴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의 주역인 순국선열의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순국선열 현충사(위패봉안관)를 번듯하게 짓고자 오랫동안 노력했고, 그 결과 2015년 국가보훈처장·서울시장과 협의서까지 작성했는데 갑자기 광복회와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추진위원단이 꾸려지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3·1운동의 주역은 순국선열이고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영향으로 태어난 자식인데 어찌 자식이 부모의 생일상에 숟가락을 놓는단 말이에요. ‘순국선열을 오막살이 셋방에 모셔 놓고 3·1운동 100주년 새벽을 맞을 수는 없다’는 내용의 ‘유족회장 사퇴의 변’을 발표하고, 이를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들에게 발송한 후 유족회장직을 사퇴했어요. 3·1운동 100주년에 순국선열에 대한 최소한의 국민적 관심이라도 끌기 위해 결의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그래서 ‘역사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가 할 일은 다 해놓고 죽자’ 다짐을 하게 된 거죠.” 


앞뒤가 안 맞는 독립운동 역사


‘유공자에 대한 국가 지원을 살아 돌아온 분들이 돌아가신 분들의 지분을 차지해버린 경우가 많은데, 독립운동 관련 역사는 제대로 되어있을까.’ 그의 호기심은 역사로 향했다. 


독립운동사를 공부할수록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등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혁신유림 세력이 신흥무관학교와 백서농장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이상룡, 김형식(백하의 둘째아들) 두 사람이 광업사를 만들어 논농사 시험을 했어요. 『김형식략전』을 보면 계속 실패하다가 1913년 말경에 성공해요. 김동삼은 흩어진 청년들에게 논농사 시험 성공을 알리고 백서농장을 설립해 여기에 우리의 살길이 있음을 설득했어요. 김동삼의 지도로 만주에 처음으로 대규모 쌀농사가 성공하면서 간난신고에 시달리던 만주의 한인들이 모두 부자가 되는 길이 열렸죠.”


조선인들은 쌀농사로 부자가 되었지만, 곧 마적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김동삼의 백서농장은 마적들로부터 스스로 지키기 위해 무기를 구했고, 400여 명에게 무기를 들게 했다. 무기를 든 청년들이 바로 군대로 발전했다. 


“이후 조선인 부자마을이 계속 생겨나 김동삼은 3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고, 전 세계 조선인 단체 대표들이 뽑은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추대될 만큼 만주 독립운동사에서 기린아 역할을 했어요.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 부의장이었죠. 그런데 만주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등에 대한 진실이 지금까지 다 묻혀 있었던 거예요.” 


그는 최근 놀라운 자료 하나를 발견했다. 이시종의 논문 「일송 김동삼의 역사인식과 독립투쟁」에서 대종교 3대종사 단애 윤세복이 1950년 대종교보에 실은 김동삼 약력에 “개천4386[1929]년 11월에 (김동삼 선생은) 한만합작(韓滿合作)의 국제운동으로 길림독군서에 교섭하시어 두 편 대표 각 60명으로 대표회의를 여는데 독군희흡(督軍熙洽)은 총재가 되고 선생은 의장이 되시었다. 그 회의에서 한인의용군 20만을 중국군대에 편입할 것과 한인교육은 그 자치회에서 실행하되 중국의 원조를 받을 것으로 결정하였고 또 상설기관을 길림에 두기로 하였다”고 쓴 대목이다.


“윤세복의 증언에서 김동삼의 독립군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임시정부의 광복군보다 30배는 훨씬 넘었을 것으로 보여요. 무엇보다 일본의 괴뢰정부, 푸이의 만주국이 탄생하기 이전에 이미 한중 연합 만주국 건설계획이 추진되었음을 밝혀 주는 증언이라 매우 중요하죠. 김동삼의 서간도 군정부가 만주국 건설이라는 대미를 마련하고 있었다는 의미거든요. 그간의 연구에서 김동삼의 활동이 상해 임시정부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고, 그의 계획은 현재 학자들이 생각하는 독립운동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막연히 추정하고 있었는데, 윤세복의 증언을 통해 사실이었음을 확신하게 됐어요.”


순국선열은 국민정신의 기둥


김시명 회장은 국민정신을 한데 모으기 위해 국민정신을 한곳으로 모을 기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국민정신의 기둥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가치관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간 우리나라 보훈 정책은 6·25 참전과 베트남 참전이 중심에 있었어요. 이후에는 5·18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죠. 정권이 바뀌면서 국민정신의 가치관이 확 바뀐 거예요. 훗날 통일이 되면 6·25 참전, 베트남 참전은 그 가치관이 더 굴절될 겁니다. 이는 우리가 국민정신의 기둥을 잘못 세웠다는 방증이에요. 반면 순국선열은 지금까지 전 국민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해왔고, 보수든 진보든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그 가치관이 크게 바뀌지 않아요. 통일돼도 마찬가지고요.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국민정신의 기둥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거죠.”


일상의 ‘호기심’이 불의에 대한 ‘분노’로, 분노가 ‘행동’으로 이어진 삶의 궤적을 들으며 “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고 일갈한 스테판 에셀이 떠올랐다. 나치에 맞섰던 전직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외교관을 지낸 93세 스테판은 『분노하라』는 책을 통해 타인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분노하라며 세상을 향해 외쳤다. 김시명 회장의 분노가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로, 새로운 희망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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