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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3/01] 안동 임청각의 안주인 김우락 지사가 부른 독립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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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칸 저택 임청각 등지고 남편 뒤따라 가시밭길 뛰어들어


부엌이 비었나니 구천은 누울 섶도 없네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김우락 지사는 19살에 명망 있는 부잣집 가문 출신의 남편인 이상룡 선생과 혼인하여 99칸 저택인 임청각의 안주인이 되었다.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이 훌륭한 저택의 마나님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을 터였다. 그러나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만주 망명을 감행한 남편의 뒤를 따라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정든 99칸 종택 뒤로하고 

만주로 망명 길 나서


김우락(金宇洛, 1854~1933) 애국지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대통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부인이다. 이상룡 선생은 경북 안동의 99칸 저택인 임청각(臨淸閣)에서 태어났는데 이 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500년 된 고성이씨의 종택으로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16명을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김우락 지사는 정든 종택을 뒤로하고 남편과 함께 식솔들을 이끌고 독립을 꿈꾸며 만주로 망명의 길에 나섰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때의 심정을 읊은 것이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이며 김우락 지사는 독립운동가이자 가사(歌辭) 작가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최일선에서 뛰면서도

망명 생활 표현한 가사 많이 남겨


김우락 지사는 1854년 2월, 경상북도 안동부 임하면 내앞마을에서 아버지 김진린과 어머니 박 씨 사이에 4남 3녀 중 넷째(맏딸)로 태어났다. 그의 친정 오라버니인 김대락(1845~1915)은 안동에서 사재를 털어 항일 국권수호 운동에 앞장섰던 분으로 1911년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뒤 이상룡 선생과 함께 경학사 등을 조직한 독립운동가다. 

김우락 지사는 19살에 명망 있는 부잣집 가문 출신의 남편인 이상룡 선생과 혼인하여 99칸 저택인 임청각의 안주인이 되었다.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이 훌륭한 저택의 마나님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을 터였다. 그러나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저택을 빼앗고 또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기고 만주 망명을 감행한 남편의 뒤를 따라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허물어진 초가삼간에 잡초가 무성한데

여러 해 사람이 들지 않아 먼지투성이네

문풍지가 우웅 우는데 어디나라 말인고

침상에서 몸이 얼어 다른 사람 몸이 되었네

솥이 차갑나니 소랑은 눈밖에 먹을 게 없고

부엌이 비었나니 구천은 누울 섶도 없네

상천의 마음이 어찌 예사로운 것이랴

남아로 하여금 고생을 실컷 겪게 하는구나


※ 소랑이란 한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소무(蘇武)를 가리키며 소무는 흉노의 황제 호의를 끝내 거부했다는 고사의 인물


이는 김우락 지사의 남편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남긴 《석주유고》(하권)에 나오는 노래다. 석주 선생의 만주 망명 생활은 눈물 없이는 마주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대서사시다. 남편이 조선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하는 동안 황무지를 개척하며 조국에서 몰려드는 청년과 애국지사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준 것은 부인 김우락 지사를 포함한 여성들이었다.

 

낯설고 물선 만주 망명을 감행한 남편과 함께 김우락 지사는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뛰면서도 ‘해도교거사’, ‘정화가’, ‘정화답가’, ‘조선별서’, ‘간운사’ 등의 가사를 지은 뛰어난 가사(歌辭) 작가다. 안동의 양반 가문 출신인 김우락 지사는 18세기 중엽부터 생겨나 갑오개혁(1894) 이후까지 양반가 출신 여성들이 중심이 된 영남지방의 규방가사 작가로 만주 망명 생활 등을 표현한 가사를 많이 남겼다. 김우락 지사는 1932년 5월, 남편 이상룡 지사가 길림성에서 숨지자 남편을 만주땅(1996년 5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으로 안장, 묘비번호2)에 묻고 가족들과 고국으로 돌아왔다. 타향살이 20여 년만의 귀향이었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서의 삶은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귀국 이듬해 4월, 여든한 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99칸 저택인 임청각을 등지고 망명길로 떠났던 이상룡, 김우락 부부의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 2019년 10월 18일(금) 안동 임청각을 찾았다.


구국운동 성지로 알려진 임청각

16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민족의 정기가 살아있는 대한민국 구국운동의 성지로 알려진 임청각은 이상룡(1962. 독립장), 김우락(2019. 애족장) 부부를 포함하여 이상동(애족장), 이봉희(독립장), 이준형(애국장), 이형국(애족장), 이운형(애족장), 이광민(독립장), 이병화(독립장), 허은(애족장) 등 16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가히 넘볼 수 없는 명문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이상룡, 김우락 부부독립운동가가 떠나고 난 뒤 임청각은 세인들의 기억에서 오랫동안 사라졌었다. 낡고 쇠락해가는 임청각을 지키기 위해 증손인 이항증 선생(78)은 혼자 외롭게 수십 년을 뛰었다. 이항증 선생은 “남들은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해방 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했다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고아원을 전전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임청각에 대한 대통령과 국민적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일제에 의해 철저히 망가지고 훼손된 독립운동가의 본거지인 임청각이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1519년(중종 14)에 지은 임청각은 사당과 별당형인 군자정, 본채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남산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한옥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가 임청각의 정기를 끊고자 중앙선 철도를 임청각 집 앞을 관통하도록 설계하는 과정에서 집의 부속 건물이 헐려 나가는 등 수난 끝에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있다. 일제는 1942년 2월 중앙선(청량리-안동) 철로를 부설하면서 안동역으로 가는 직선 선로를 놔두고 일부러 독립운동의 산실인 임청각을 훼손하는 우회 철로를 놓았다. 악의적인 일이었다. 이로써 민족의 자존심이던 임청각은 밤낮으로 마당 앞을 지나는 열차의 굉음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으로 2020년 12월 16일 밤, 마지막 열차 운행을 끝으로 철로 변경 끝에 ‘일제의 괴물 열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의 괴물 열차’ 역사 속으로 사라져

후손들의 피맺힌 응어리도 풀려야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억하고자 마지막 열차가 도착한 16일(수) 밤 7시 30분, 안동역에서는 의미 있는 조촐한 행사가 있었고 다음 날인 17일(목), 임청각에서 조상에게 고하는 고유제가 열렸다. 코로나19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임청각에 드리운 일제의 흔적을 지우는 행사’에 참여하여 지난 세월의 고통을 이기고 묵묵히 버텨온 임청각의 꿋꿋함에 큰 손뼉을 쳐주었다.


“제가 특별히 한 일이 있겠습니까? 일제가 임청각을 훼손하기 위해 철도를 부설한 지 80년 만에 철거하게 된 것은 오로지 임청각에 대한 많은 분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가능했던 것이지요.”


쓰라린 역사의 현장인 임청각에서 ‘임청각을 지나는 마지막 철로’를 지켜본 증손 이항증 선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기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어 선생은 “나의 증조부 이상룡(李相龍), 조부 이준형(李濬衡), 아버지 이병화(李炳華) 3대가 50여 년을 전 재산을 바쳐가며 독립투쟁을 했지만 대일항쟁기의 피해가 고스란히 남은 집 임청각과 유족을 국가는 외면했습니다. 조부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헌법상 국가원수(대한민국정부 국무령)이지만 훈장(독립장) 하나로 때웠지요. 보훈의 참뜻은 ‘나라가 유족을 책임지니 걱정하지 말고 나라 사랑하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동안 보훈 유족이 생계마저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누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것이며, 안보가 지켜질 것입니까?”라고 했다. 


국난의 시기에 집과 재산과 목숨까지 바쳐 헌신했던 대(大) 독립운동가 집안의 이상룡·김우락 지사 부부의 증손자 가슴에는 아직도 피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가 유족의 처절한 외침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시효가 없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의 1번지, 안동 임청각의 산증인 증손 이항증 선생께서 남은 삶을 건강히 보내시면서 가슴의 맺힌 응어리를 하나둘씩 풀어가셨으면 하는 바람을 토끼해(계묘년)을 맞아 기원해본다.  


필자 이윤옥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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