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 Theme.3 만주지역 항일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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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도 기억도 사라진 7인 열사 참변
배일학교 설립해 구국운동
일본군 토벌대 표적 되어
얼굴·몸에 죽창 마구 찔려
글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에게는 위대한 승리였지만, 반면 만주지역의 한인들에게는 재앙이기도 했다. 일본군 토벌대는 청산리에서 대패한 직후인 10월 26일, 연길현 23개 마을과 18개 학교, 화룡현 12개 마을과 19개 학교, 왕청현 11개 마을과 5개 학교에서 학살을 감행했다. 경신참변의 서막이었다. 일본군 토벌대가 저지른 만행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지는 단 두 곳뿐이다. 길림성 용정시 동성용진 인화촌의 ‘장암동참변기념비’와 길림성 통화시 부강향 배달촌의 ‘7인열사능원’이다. 장암동 참변은 용정의 영국 조계지에서 제창병원을 운영하던 마틴(S.H.Martin) 선교사가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견문기를 남겨 놓았기에 당시의 정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7인 열사의 참변은 관련한 기록이 전혀 없을뿐더러 현장에서도 그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다.
일본군 토벌대는 청산리에서 대패한 직후인 10월 26일, 연길현(延吉縣) 23개 마을과 18개 학교, 화룡현(和龍縣) 12개 마을과 19개 학교, 왕청현(汪清縣) 11개 마을과 5개 학교에서 학살을 감행했다. 『연변조사실록(延邊調査實錄)』에는 그때의 참혹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 침략자들은 조선인 촌락에 대해 위협, 공갈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무릇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자가 있으면 즉시 총칼로 찔러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했다.” 바로 경신참변(庚申慘變, 달리 間島慘變이라고도 함)의 서막이었다.
일본군 토벌대가 저지른 만행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지는 단 두 곳뿐이다. 길림성 용정시(龍井市) 동성용진(东盛涌镇) 인화촌(仁化村)의 ‘장암동참변기념비’와 길림성 통화시(通化市) 부강향(富康鄕) 배달촌(倍達村)의 ‘7인열사능원’이다. 장암동 참변은 용정의 영국더기(영국의 조계지)에서 제창병원(濟昌病院)을 운영하던 마틴(S.H.Martin) 선교사가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견문기를 남겨 놓았기에 당시의 정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7인 열사의 참변은 관련한 기록이 전혀 없을뿐더러 현장에서도 그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다.
단군의 후예 양성하고자 ‘배달학교’ 설립
조용석(趙庸錫, 1861~1920)은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에서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정주군은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를 한양 다음으로 많이 배출한 문향(文鄕)의 고장이다. 조용석도 33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제의 그늘에서 벼슬살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17년에 일가족을 데리고 길림성 통화현(通化縣) 반랍배(半拉背)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나라를 되찾는 데 사력을 다하자, 마음먹었다.
그러던 차 조용석이 동향인 이시열(李時說, 1892~1980)과 조우했다. 이시열은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대동청년단(大東靑年黨)에서 활동하다가, 1911년에 서간도로 망명해서는 환인현(桓仁縣) 동창학교(東昌學校)와 흥경현(興京縣) 흥동학교(興東學校)에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이시열이 몸담았던 학교가 모두 배일학교로서 정평이 난 터였고, “나는 왜놈 천 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라는 의미에서 불천(不千)이라는 별명까지 사용하고 있던 터라, 조용석은 이시열을 자신과 함께 배일학교를 설립할 적임자로 손꼽았다.
조용석은 이시열에게 통화현 반랍배에 배일학교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이시열은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흥동학교에서 함께 재직하던 교사들을 불러들였다. 이렇게 1918년 3월 배달학교를 설립했다. 조용석은 교사(校舍)를 마련했고, 이시열은 교육을 담당했다. 개교 당시 교사는 15명이었고 학생은 30명이었다. 통화현에서는 한인자치기구로서 ‘부여를 계승한 민족’의 의미를 담은 부민단(扶民團)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용석은 이를 고려하여 교명을 ‘배달학교(倍達學校)’로 정했다. ‘단군의 후예를 배양하는 학교’라는 의미였다.
배달학교는 배일학교답게 항일의지를 고취하는 각종 행사를 치렀다. 예컨대 개교년인 1918년 8월 29일,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국치일(國恥日)을 기해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 100여 명이 모여 독립의 당위성을 제기하는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10월 개천절(開天節)에는 반만년 민족의 자긍심을 고양하는 전시교육과 공연예술을 선보였다. 이듬해 1919년 3월 13일에는 3·1운동의 영향으로 독립경축식을 거행하는가 하면, 마을 한복판에서 독립 만세 가두시위를 벌였다.

배달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설립 관계자 피살
일본군 토벌대가 북간도를 넘어 서간도에 들이닥쳤다. 1920년 11월 1일, 요녕성 철령(鉄嶺)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스기야마(杉山正之) 대좌가 이끄는 보병 1개 대대가 반랍배로 출정했다. 이때 보민회(保民會)가 스기야마를 배달학교로 안내했다. 보민회는 3·1운동 직후 만주지역의 항일단체를 타도할 목적으로 설립했으며, 경신참변 당시에는 일본군 토벌대의 출정에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결국 11월 2일, 스기야마가 배달학교 설립자 조용석(趙庸錫), 교감 김기선(金基善), 교사 조동호(趙東鎬)를 체포했다. 그리고 교사(校舍)와 집기류를 모두 불태웠다.
또한 인근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지도급 인사 승병균(承昞均), 승대언(承大彦), 김기준(金基畯), 최찬화(崔贊化)를 체포했다. 한족회는 1919년 4월 통화(通化), 유하(柳河), 흥경(興京), 집안(輯安), 환인(桓仁) 등지의 한인들을 중심으로 부민단(扶民團)이 결성한 항일 조직이었다. 본부를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 설치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한족회는 이회영(李會榮), 이상룡(李相龍) 등이 설립 운영한 경학사(耕學社)에서 비롯했다. 따라서 군정부(軍政府)를 두고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대 개편하는 데 주력했다. 청산리대첩을 이끈 주역들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한족회는 일본군 토벌대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11월 3일, 일본군 토벌대는 7인의 열사를 이끌고 통화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형식적이나마 재판을 벌일 요량이었다. 그런데 마침 폭설이 내렸다. 그러자 일본군 토벌대가 반랍배에서 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환희령 고개에서 7인의 열사를 임의로 처단했다. 죄명은 “불령한 행실이 뚜렷하고, 개선의 가망도 없고, 방치하면 보민회 활동에 장애가 될 것이고, 치안에도 악화만 초래할 것”이었다. 훗날 교감 김기선의 딸은 “당시 일본군이 7인의 얼굴과 몸을 칼과 죽창으로 마구 찔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입은 옷을 보고 시신을 가려야 했다”라며 그날의 참혹상을 회고했다.
열사들의 시신은 고갯마루에 널브러져 있었다. 폭설로 오가는 사람도 없어, 유족들은 이틀 뒤에야 시신을 확인하고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소됐지만, 배달학교 인근 비탈에 시신을 안장했다. 이렇게 배달학교가 폐교되었다. 조용석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나 동생 조후석(趙厚錫)이 유지를 받들어 아들 조태연(趙台衍)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조태연은 훗날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정근(安定根)과 사돈지간을 맺었다. 또한 손자 조지영(趙志英)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군사과장으로 활동하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설에 일조했다. 한국 정부는 조용석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에는 훈격을 높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경신참변 참혹상 알리는
교육장으로 활용

송구한 마음에 추석을 기해 벌초라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 2020년에 국가보훈처와 협력하여 7인열사능원을 새로이 단장했다. 진입로를 가설하고, 울타리를 설치하고, 제단을 넓히고, 허물어진 봉분을 세웠다. 그리고 청산리대첩, 이 위대한 승리에 가려진 경신참변의 참혹상을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 알리는 교육장으로 활용했다. 드넓은 만주 벌판이지만, 사방 100km 내에 산포하고 있는 유인석(柳麟錫) 선생 기념원, 이진룡(李鎭龍) 장군 기념원, 경학사(耕學社) 및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옛터, 국민부(國民府) 본부 및 양세봉(梁世奉) 장군 흉상, 동창학교(東昌學校) 분교로서 노학당(老學堂) 기념비 등과 연계할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충북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학박사 학위를 복수 취득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자원센터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했고,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충북대학교 교양학부에서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중국 선양시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소장을 역임하며, 한·중 문화교류 연구 및 관련한 문화산업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