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 Theme.1 을사늑약 체결과 한국민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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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나라 찾고자 민초들 도처에서 궐기
‘을사년 6충신’ 자결 순국
의병·국채보상운동 확산
방방곡곡 의열투쟁 나서
글 |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무능한 군주와 비겁한 지도층은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나 이 땅의 민초들은 도처에서 궐기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늑약 소식을 알고 11월 30일 국민의 궐기를 호소하며 자결 순국하였다. 조병세·송병선·홍만식·이상철·김봉학 등 ‘을사년의 6충신’이 뒤를 이었다. 선비 최익현은 1906년 6월 “죽는 것도 물론 좋지만 사람이 모두 죽으면 누가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겠는가”라고 탄식하며 전라도 태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1월 29일 서상돈·김광제 등이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면서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처단 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날씨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날을 ‘을씨년스럽다’고 한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백성들의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하고 찌푸린 날을 ‘을사년스럽다’로 표현하다가 ‘을씨년스럽다’로 전이된 것이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 땅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우리나라는 사실상 40년간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세계 식민지 역사상 가장 악독했던 일제의 식민통치는 광복 77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속죄하지 않고, 여전히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반성을 모르는 작태를 보이고 있다. 을사늑약부터 1910년 병탄 직전까지 의열(의병) 투쟁을 살펴보자.
무능한 군주와 비겁한 지도층은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나 이 땅의 민초들은 도처에서 궐기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가장 먼저 을사늑약이 강제된 사실을 폭로한 사람은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다. 11월 20일 자에 ‘시일야방성대곡’(오늘에 목놓아 통곡한다)이라는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을 폭로했다. 그리고 “개·돼지만도 못한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2천만 백성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을사오적을 비판하였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늑약 소식을 알고 11월 30일 국민의 궐기를 호소하며 자결 순국하였다. 민영환 외에 조병세·송병선·홍만식·이상철·김봉학 등 애국지사들이 뒤를 이어 자결 순국하니 이들을 ‘을사년의 6충신’이라 불렀다.
애국지사들의 자결 순국이 잇따르자 한일의정서 체결을 반대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기도 했던 선비 최익현이 1906년 6월 “죽는 것도 물론 좋지만 사람이 모두 죽으면 누가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겠는가”라고 탄식하며 전라도 태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각지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는데, 일본군을 대신하여 투입된 대한제국의 진위대에 포위되자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을 해산시키고 스스로 피체되었다. 이후 일본군에 의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일본의 물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겠다며 단식 끝에 절명 순국하였다.
1907년 1월 29일 서상돈·김광제 등이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면서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강제적으로 차관을 떠맡기고, 이를 빌미로 경제침략을 개시했다. 당시 차관총액은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이었다. 이를 갚기 위해 전국에서 금주·금연운동이 일어나고 여성들이 패물을 헌납하는 등 열기가 끓어오르자 통감부는 이 운동을 주도한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을 성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고, 1908년에는 2천만 원의 차관을 반강제로 더 공급하는 등의 책략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억압했다.
거센 을사오적 처단 운동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처단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나철(본명 나인영)과 오기호·이기·윤주찬 등은 비밀결사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을 처단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그 여력으로 국권회복 투쟁을 전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들은 1907년 3월 25일 매국노들을 일거에 처단하고자 우국지사 6명을 선발하였다. 총책은 나철이 맡았다. 이들은 5적 외에 참정대신(수상)인 박재순을 포함하여 6적을 처단키로 했다. 6명의 역적과 6명의 인솔 결사대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박재순(참정대신) - 오기호(인솔 결사대)
이지용(내부대신) - 김동필(인솔 결사대)
권중현(군부대신) - 이흥내(인솔 결사대)
이완용(학부대신) - 박대하(인솔 결사대)
이재극(법부대신) - 서태운(인솔 결사대)
이근택(전 군부대신) - 이용채(인솔 결사대)
결사대원들이 성공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어서 병기에 서툴렀으며 매국노들은 철저한 경호를 받고 있어서 처단이 쉽지 않았다. 거사에 나섰던 지사들은 5년 내지 10년의 유배형을 당하고 대원 중에는 사형집행으로 순국한 분도 있었다.
1907년 4월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으나 회의 참석이 거부당하자 이준이 순국했으며,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이 즉위한다. 서울시민 2천여 명이 고종 양위에 반대하여 시위했으며, 이완용 등 매국노의 집에 불을 질렀다.
8월 1일 한국군 대대장 박승환이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자결하면서 한국군이 봉기, 일본군과 충돌하여 수십 명이 사망했으나 주력부대는 시외로 빠져나가 이후 항일의병에 참가한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학계에서는 이를 정미의병이라 부른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 봉기

12월 6일 강원도 원주에서 13도 창의군이 조직되어 유학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1908년 초에 서울 진공작전에 나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이후 13도 창의군은 해산되고 의병들은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의병투쟁을 벌였다.
1908년 3월 23일 전명운·장인환이 통감부 외교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처단했다. 일본의 조선침략을 비호한 인물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국적(國賊)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처단했다. 안중근은 거사 전에 ‘이등(이토) 도살가’를 지었다.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하면서 각지에서 이토를 저주하는 민요가 불렸다. 그중의 한 편인 ‘십진가(일본놈 이등박문이가)’는 다음과 같다.
일 일본놈의 / 이 이등박문이가 / 삼 삼천리 강산에서
사 사주가 나뻐/ 오 오대산을 넘다가 / 육 육혈포를 맞고
칠 칠십 먹은 늙은이가 / 팔 팔자가 사나워
구 구둣발로 채워〔채여〕 / 십 십자가(十字架리)〔열조가리〕가 났다
일제 삼광작전으로 의병 학살
같은 해 12월 22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했으나 숨통을 끊지는 못하고 피체되어 이듬해 사형되었다. 해가 바뀌어 1910년 1월 29일 평안도 순천에서 3,000여 명의 민중이 재무서, 경찰서, 군청을 습격 파괴하고 4월 15일 이시영·이동녕·양기탁이 서간도 요녕성 삼원보에 독립운동을 위한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교육기관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을사늑약에서 경술국치에 이르는 기간 즉, 국가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놓여 있을 때 전국 각지에 수많은 의열지사들이 구국전선에 나섰다. 제2기 의병(1905~1907)은 최익현·신돌석·민종식·정환직과 정용기·유시연 의병장이 있었고, 제3기(1907~1909)에는 이강년·허위·민긍호·전해산·이은찬·김수민·한봉주·안규홍·기삼연·심남일 의병장, 제4기(1909~1910년)는 홍범도·이범윤 의병장이 크게 활약했다.
일제는 1909년 9월 2일 이른바 남한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의병이 활동하는 마을 전체를 ‘삼광(三光)작전’ 즉 모조리 학살, 모조리 소각, 모조리 약탈하는 학살극이었다. 영국 기자 맥켄지는 취재록에서 “유복했던 마을이 온전한 벽도 대들보도 파손되지 않은 그릇도 하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지도상에 사라졌다”고 그 참혹상을 보도하였다.

필자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 3·1운동·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회 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