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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 Theme.3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과 망국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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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117년에 생각나는 사람들 


우국심도 양심도 없었던

조선의 상류 지식인들

3천만 엔에 나라 팔아 


글 | 신복룡(전 건국대 석좌교수)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병합을 도모하고 있을 때 고종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지금이야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의 국적(國賊)이라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고종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통감으로 부임해줄 것을 부탁하고, 대신들에게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이토는 조선 침탈을 진행하면서 한국인의 입에서 먼저 합방이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는 이용구와 송병준을 매수하여 한일합방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총리대신 이완용은 이를 기각했다. 합방의 ‘공로’를 이용구의 무리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당대 지도자들은 이토를 필적할 우국심도 없었고, 그를 대적할 결기도 없었고, 그의 미끼를 거절하거나 피할 양심도 없었다. 1억 엔을 주면 조선을 넘겨주겠다고 먼저 제안한 사람은 송병준이었다. 결국 이토는 3천만 엔으로 조선을 사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조선 망국의 진상이다. 


11월 17일, 을사늑약 117년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달이다. 시대는 늘 소란했지만 애국과 반일을 생계로 여기는 사람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생각 없이 말을 쏟아내어 나라의 장래를 어지럽게 하는 현실이 걱정스럽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는 하지만, 명색이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공부가 부족하고 국가의 장래를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서글프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업 시대


우리의 이야기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일본의 인물을 살펴보자. 을사늑약을 맞이하며 굳이 그를 되짚어보는 것은, 당대의 위정자들은 물론 우리의 역사학이 한일관계사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능력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진의 사령관 이토 히로부미는 출신이 성(姓)도 없이 미천한 열등감으로 자신의 외양을 권위 있게 치장하고자 명예나 위계 또는 훈장에 병적으로 집착한 출세주의자였다. 그는 비상한 두뇌와 친화력을 가진 인물로서 위로는 다이묘(大名)로부터 아래로는 야쿠자(八九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인맥을 맺고 있었으며, 특히 상사의 의중을 읽을 줄 아는 특출한 인물의 소유자였다. 운명적이었는지 그 참혹한 다이묘(大名)의 싸움 중에 질병이었든, 또는 횡사였든, 그의 정적들은 “적절한 시기”에 죽었다. 그는 대세[板]를 읽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삶의 길을 찾는 후각도 상당히 발달한 인물이었다. 키가 작은 것 말고는 그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스승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으로부터 정한론(征韓論)의 유지를 받은 그는 멀리 보면서 내치파들이 투쟁하는 동안 일찍부터 서구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그 연배에서 가장 먼저 영어를 터득했다. 그것은 그의 노력과 예지였다. 전통적인 정한론자들이 조선과 만주, 그리고 동부 시베리아를 무대로 삼아 꿈을 이루려 할 때 그는 훌쩍 유럽과 미국으로 나가 프러시아의 헌법과 군제(軍制)를 배우고, 영국의 식민 정책을 학습하고, 미국이 주도하게 될 세계 대세의 파도를 타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83년을 전후로 두 차례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를 찾아갔다. 이때 그는 프러시아가 왜 강한가? 하는 질문을 품으면서 그들의 육군과 대(對)러시아 정책을 배웠으며, 비스마르크의 카리스마를 배웠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세계 각국은 표면적으로는 신의를 바탕으로 한 교제를 말하고 있지만 실은 약육강식”이라고 일러주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에게 경도되었고, 뒷날 비스마르크의 담배 피우는 모습까지 흉내 낼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비스마르크 이외에도 이토 히로부미의 대한 정책에 가장 영향을 끼친 몇 사람의 영국인이 있다. 첫 번째 인물은 밀너(Alfred Milner : 1854-1925)였다. 그는 본디 독일에서 귀화한 이민 가족이었다. 그의 외가는 영국의 명문이었다. 밀너는 옥스퍼드대학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이미 젊은 경제사학자로 문명을 날리던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를 만나 식민 정책에 눈뜨게 되었다. 이 사람은 후대의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Toynbee)의 삼촌이었다. 


밀너는 졸업과 함께 대장성에 들어가 부상(副相)에 올랐는데, 이때 마침 영국의 식민지인 이집트에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그를 수습하는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는 1889년부터 4년 동안 이집트에 근무하면서 금융 위기를 수습한 다음, 귀국하여 자신의 경험을 주제로 『영국의 이집트 통치』(1892)을 출판하여 식민 통치의 전문가로 부상했다. 이집트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이집트는 아직 헤로도토스(Herodotus)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밀너는 훼비안협회(Fabian Society)의 회원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로이드 조지(Lloyd George)의 전시 내각에서 전쟁상을 지낸 뒤 곧 식민상을 지냈다. 그는 이집트에 근무할 당시에 [뒤에 언급할] 크로머 경(Lord Cromer, Baring)과 함께 이집트 지배를 이끌었다. 식민지에 대한 그의 입장은 “통치국이 피지배국가의 외형적 안정에만 힘쓰지 말고 먼저 그 민족을 말살하고 피지배국가의 뿌리 깊은 악행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밀정에 가까운 군사(janissary)를 먼저 파견한 다음 그 명분으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강력하고 잔혹한 폭정을 시행하면서 곪아 터진 군중들이 느끼는 망국의 슬픔이나 불만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깔아뭉개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에 일본에는 이노우에 마사지(井上雅二)라는 인물이 있었다. 효고현(兵庫県) 출신인 그는 해군병학교(兵学校)에 입학하였으나 대륙 진출의 꿈을 안고 자퇴하여 도쿄(東京)전문학교(지금의 早稲田大学) 아세아주의(亞細亞主義) 단체인 동아동문회(東亜同文会)에서 활동하면서 학업을 마쳤다.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이노우에 마사지는 동아동문회 특파원과 체신성 촉탁의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하여 1905년에 조선의 경제 고문인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의 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에 궁내부 서기관으로 전보되어 귀국했다. 


구미 유학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노우에 마사지는 영어에 유창했다. 그는 중국에서 서구 식민지사를 공부하던 가운데 바로 밀너의 『영국의 이집트 통치』를 읽고 깊이 심취하여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한국경제자료 : 이집트에서의 영국 (韓國經濟資料 : 埃及に於ける英國』(1906)을 출판했는데, 이 책이 정한론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도 그 애독자 가운데 하나였다. 이노우에 마사지의 책에는 식민 정책에 관한 그의 의견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크로머 경의 통치술을 설명하고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롤모델 크로머 경


이토 히로부미가 식민 통치의 성공 모델로 여긴 두 번째 인물은 앞서 밀너가 격찬한 크로머 경(Lord Cromer : 1841–1917)이었다. 그의 본명은 바링(Evelyn Baring)이었다. 그도 밀너처럼 독일계 이민의 후손으로 영국에 정착하여 금융업으로 크게 성공한 가문이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그리스 영토로서 영국의 지배를 받던 코르프(Korf) 주둔군 포병대에서 근무하면서 고대 그리스·로마·이집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69년에 귀국한 크로머는 다시 육군참모대학을 졸업한 뒤 전쟁성에 들어가 크리미아전쟁 전후 처리 문제에 관여했고, 그 뒤 인도 총독 노드부르크 경(Lord Northbrook)의 비서로 봉직하면서 최고훈장(CSI)를 받았다. 크로머는 온유함과 잔혹함을 겸비한 수재였다. 


크로머가 이집트에 부임한 것은 1877년이었는데, 밀너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금융 위기를 타개하고 대영 항쟁을 진압하라는 특수 임무를 띠고 있었다. 마침 그때가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여서 크로머는 이집트 면화를 수출하여 거금을 마련함으로써 이집트의 금융 위기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수에즈운하의 건설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탁월한 능력을 보이자 영국은 크로머를 이집트 책임자로 임명했는데(1883~1907) 공식 직함은 이집트 총독이 아니라 이집트 주차 총영사였다. 


크로머는 이집트를 수탈하면서도 가책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백인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우리는 이집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이지 점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견해를 고수했다. 크로머나 밀너는 모두 “논리적인 프랑스나 권위주의적인 독일은 이런 일을 해낼 수 없다. 오직 영국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일본의 조선 통치에 많은 암시를 주었다. 지금도 이집트인들이 관광이나 학업을 위해 영국에 가면 크로머의 무덤에 침을 뱉는 의식(儀式)을 치른다. 


이토의 대한정책은 위와 같이 이집트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정책을 적용한 것인데, 이를 정리하면, (1)첨수(添水 :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이 침투함), (2)회유(懷柔), (3)정탐(偵探), (4)황실 매수, (5)외식(外飾 : 겉이 번지레하게 가꿈), (6)농락(籠絡), (7)방휼(蚌鷸 :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힘), (8)시위(示威) (9)단맥(斷脈 : 왕실의 후계를 끊음), (10)자구(藉口 : 계속하여 구실을 만듦) 정책이었다. 


그렇다면 이토 히로부미가 영국의 이집트 통치에서 배운 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조선 병합에서 실천했는가? 이노우에 마사지의 이론을 종합하면 :


(1) 먼저 피식민지 국가에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재정을 장악한다. 차관은 족쇄이다. 영국이 로즈차일드(Rothschild Bank)에서 4백만 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하여 이집트 지분의 수에즈운하 주식을 매입하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후한 차관을 제공했다. 그것은 독배였다.  

(2) 식민지 백성을 배고프지 않게 해준다(full-belly policy). 이것이 이토의 조선 정책의 핵심이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농업생산고가 오른 것은 이 정책의 소산이었다. 

(3) 세금을 줄여 민생고를 덜어주면서 동시에 수탈의 인상을 주지 않는다. 가렴주구에 시달린 조선인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정책은 없었다. 

(4) 영국의 크로머 경이 이집트 지배에 성공하자 그렌빌 독트린(Granville Doctrine)이라는 정책을 발표하여 “영국이 이집트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크로머 경에게 항명하는 관리는 해임할 수 있다”고 공표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처럼 조선 병합을 도모하고 있을 때 고종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지금이야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의 국적(國賊)이라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고종(高宗)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통감으로 부임해 줄 것을 부탁하고, 대신들에게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분노하며 통곡했다는 기록은 우리 쪽 이야기일 뿐이다.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를 치하했다니 이것이 망국의 군주가 침략의 수괴 앞에서 할 말인가? 이러고도 고종을 ‘영명하고 고뇌한 개혁 군주’라 말할 수 있는가? 고종은 이토의 속마음을 읽을 만한 명군(明君)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것은 그의 미욱한 탓이지 이토를 탓할 일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망국의 군주가 영명했던 사례는 없다. 군주가 영명한데 멀쩡한 나라가 멸망한 사례가 역사에 없다. 


이토는 조선 침탈을 진행하면서 한국인의 입에서 먼저 합방이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는 이용구(李容九)와 송병준(宋秉濬)을 매수하여 한일합방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은 이를 기각했다. 이는 그가 한일합방을 반대하고자 함이 아니라 합방의 “공로”를 이용구의 무리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고 양계초(梁啓超)는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는 데는 송병준과 이완용의 공로가 이토 히로부미보다 크다”고 기록했다. 


식민지 개척에는 상류 지식인을 먼저 매수해야 한다는 밀너의 가르침을 일본은 충실히 이행한 셈이다. 양계초의 표현은 더 구체적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주변국 사람들은 한국의 망국에 눈물을 흘리는데 조선인들은 흥겨워하고, 고위 관리들은 날마다 새로운 시대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기 위해 분주하고 기뻐했다.”(『일본병탄조선기』, 1910)


우국심도 양심도 없었던 조선의 지도자들 


민족이든 국가든, 그들의 멸망사는 사람이 저지른 재앙[人災]이었다는 것이 내 일생 동안 쓴 한일 관계사의 핵심 논리이다. 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이 한국을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이 스스로 멸망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을사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 고쳐 부른다고 해서 일본의 침략이 면탈되고 조선의 체통이 서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당대 지도자들은 이토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를 필적할 우국심도 없었고, 그를 대적할 결기도 없었고, 그의 미끼를 거절하거나 피할 양심도 없었다. 1억 엔(圓)을 주면 조선을 넘겨주겠다고 먼저 제안한 사람은 송병준(宋秉畯)이었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었다. 결국 이토는 3천만 엔(조선총독부 「관보」(1911. 12. 27.)에 따르면 당시 1엔은 지금의 구매력으로 한화 33,000원 정도임)으로 조선을 사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조선 망국의 진상이다. 


필자 신복룡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와 대한민국 학술원상 심사위원,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그리고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앙도서관장, 대학원장,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한국분단사연구』, 『한국사 새로 보기』, 『한국정치사상사』, 『해방정국의 풍경』, 『전봉준평전』, 역서 『한말 외국인기록』(전 23권), 『삼국지』(전5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전5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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