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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 Theme.4 을사늑약과 순국선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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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국가 운명과 함께하며

‘순국’ 택한 선열들의 

희생 기리는 건 책무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대한민국이 기념해야 할 국가기념일이다. 순국선열의 날의 기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에 3월 1일 독립선언일, 4월 11일 헌법발포일, 10월 3일 건국기원절 등 3개의 국경일을 제정하여 기념해 오다가 1939년 순국선열기념일을 정해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후 사회의 혼란과 6·25전쟁 등으로 순국선열기념일은 기념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태가 이어졌다. 서울과 부산의 작은 사찰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당한 선열들을 추모하는 정성이 어렵고 가늘게 이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5월 9일에야 ‘순국선열의 날’을 정부기념일로 제정·공포하였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대한민국이 기념해야 할 국가기념일이다. ‘국가기념일’이란 국가적으로 온 국민이 축하하거나 기릴 만한 일이 있을 때, 해마다 그 일이 있었던 날을 기억하기 위해 정부가 제정하고 주관하는 날이다. 우리나라의 기념일은 크게 국경일, 법정공휴일, 기념일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등이 대한민국의 ‘국경일’이고, 1월 1일, 부처님오신날, 성탄절 등은 ‘법정공휴일’이며, 오늘의 주제인 순국선열의 날 등은 ‘기념일’이라 하는데 현재 대한민국은 총 53개의 기념일이 지정되어 있다.


순국선열의 날은 왜 11월 17일일까? 순국선열의 날은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차 회의에서 11월 17일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여 광복으로 환국할 때까지 매년 거행되어왔다. 그렇다면 임시의정원은 무엇인가? 임시의정원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의회였다. 근대민주주의는 시민에 의한 시민의 자기지배 방식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자를 통한 간접적인 통치, 즉 대의제 민주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시도가 있을 때, 그 정부가 권한을 가지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든 기구가 바로 임시의정원이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은 대의제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본국에 있는 국민의 주권을 광복운동자들이 대행한다는 생각으로 1919년 4월 10일 출발하였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했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였으며, 제헌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함으로써 민족적 염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상 최초의 의회 명칭이 ‘의정원(議政院)’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정원이란 말 그대로 정치적인 사안들을 의논한다는 의미인데, 우리에게는 조선조의 최고 의결기구인 ‘의정부’로 인해 익숙한 용어이기도 하다.


한편 조선의 의정부가 의정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의정부는 더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자신의 소중한 기능을 비변사에 넘겨주고 말았다. 비변사에 밀려난 의정부는 마침내 개화기에 들어 서구 근대적인 정부 형태가 소개되면서 정부와 의회로 분화되어 간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근대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나, 의회는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설립되지 못했다가, 망한 나라를 되찾으려는 거족적인 3·1운동을 계기로 근대적 의회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순국선열기념일 제정 결의


1939년 11월 21일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매년 11월 17일을 전국 동포가 공동히 기념할 ‘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하자는 지청천, 차이석 등 6의원의 제안에 대하여 원안대로 통과」하기로 결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순국한 이들을 각각 일일이 기념하자면 번거(煩擧)한 일일뿐더러 무명선열(無名先烈)을 유루(遺漏) 없이 다 알 수 없으므로 1년 중에 1일을 정하여 공동히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認)한 바이요. 이제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정한 이유에 대하여는 대개 근대에 있어서 순국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國亡)을 전후하여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비분 또는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때의 일을 기념일(紀念日)로 정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망한 것으로 말하면 경술년(庚戌年) 8월 29일의 합방발표는 그 형해(形骸)만 남았던 국가의 종국을 고하였을 뿐이요, 그 실(實)은 을사년(乙巳年) 보호5조약(保護5條約)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므로 그 실질적 망국조약이 늑결(勒結)되던 11월 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殉國先烈紀念日)」로 정한 것임 


임시의정원의 결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먼저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더 논의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부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선열을 한 분 한 분 기념하기가 불가능했고, 무엇보다도 무명선열들을 빠짐없이 다 기릴 수 없기에, 일 년 중 하루를 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11월 17일은 실질적으로 나라가 망한 망국조약이 늑결된 날이기에 이날로 정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임시정부의 기념일을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3개의 국경일을 정해놓고 기념하였으니, 3월 1일 독립선언일, 4월 11일 헌법발포일, 그리고 10월 3일 건국기원절이 그것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의 모태가 되었던 3·1절과 임시헌장을 반포한 헌법발포일을 임시정부에서 기념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면 건국기원절[개천절]을 기념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독립운동에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역사가 일제보다 더 유구(悠久)하다는 인식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나철은 그 답을 ‘단군’에서 찾았다. 그는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운 만큼 흩어진 민족의 마음을 모으는 중심점으로 삼고자 민족 종교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했다. 임시정부는 점차 거세지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민족의 단결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판단하에 개천절을 의미하는 건국기원절(음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만들어 그 뜻을 되새겼던 것이다. 


순국정신은 ‘대한민국의 정신적 고향’


임정의 3대 국경일을 2022년 오늘의 대한민국 국경일과 비교해보자. 현재 우리는 5대 국경일을 기념하고 있다. 3·1절(3월 1일), 제헌절(7월 17일), 광복절(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 한글날(10월 9일)이다. 한글날과 개천절을 제외한 나머지 국경일이 모두 우리 근현대사와 관련이 있는 기념일이다. 광복절은 임시정부에선 당연히 기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머지 3개의 기념일은 여전히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으니,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순국선열의 날’은 어떤가? 앞에서 보았듯이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에 3개의 국경일을 제정하여 기념해 오다가 1939년에 순국선열기념일을 정해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감격의 광복을 맞이한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환국을 한 날은 11월 23일이었다. 환국을 앞두고 11월 17일 타국에서 순국선열을 기념할 수 없어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12월 23일 첫 순국선열기념식 행사를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때 제전위원장 김구가 읽은 추념문이 바로 정인보가 작성한 저 유명한 ‘순국선열 추념문’이다. 이제 옷깃을 여미고 그 추념문을 다시 읽어본다.


…몸은 쓰러져도 魂[혼]은 나라를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그 壯[장]하고 매움을 말할진대 어느 분의 最後[최후]가 天泣地哀[천읍지애]할 巨迹[거적]이 아니시리요? … 그러므로 우리 過去[과거] 四十一年[사십일년]을 통틀어 日寇[일구]의 役[역]이라 할지언정 하루라도 彼[피]의 時代[시대]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殉國先烈[순국선열]들의 끼치신 피 香[향]내가 恒常[항상] 이곳에 主氣[주기]되어 온 緣故[연고]니 이 여러분 先烈[선열]이 아니런들 우리가 무엇으로써 圓球上[원구상]에 서리요. … 언제나 殉烈[순열]의 先民[선민]은 有國[유국]의 楨幹[정간]이시라. 그 가운데도 우리의 過去[과거]를 생각하건대 先烈[선열]은 곧 國命[국명]이시니, 往往[왕왕]이 一人[일인]의 피로 因[인]하여 民族[민족]의 昭蘇[소소]함을 보게 됨이 어찌 徒言[도언]이리까? … 여러분 在天[재천]하신 英靈[영령]들은 우리를 위하여 耿耿[경경]하실지니 그 百折不屈[백절부굴]하신 義氣[의기], 至純至潔[지순지결]하신 高操[고조], 民我無間[민아무간]하신 聖心[성심], 雄猛卓特[웅맹탁특]하신 勇槪[용개]를 全[전] 國民[국민]으로 하여금 效則[효칙]하게 하사 이로써 泰運[태운]을 맞이하여 위로 國祖弘益[국조홍익]의 聖謨[성모]를 重新[중신]하게 하시여 아래로 三千萬[삼천만]의 祈願[기원]을 맞추어 이루게 하소서.


추념문에서 주목할 내용은 무엇보다도 일제 41년을 적의 식민지라 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는 점이다. 41년간 적의 부림[役]하에 있었지만 저들의 시대라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항상 선열들의 희생이 계속되어 왔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바로 우리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인식이었음을 위 추념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사회의 혼란과 6·25전쟁 등으로 순국선열기념일은 기념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태가 이어졌다. 서울과 부산의 작은 사찰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당한 선열들을 추모하는 정성이 어렵고 가늘게 이어졌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1956년부터 현충일 추념식에 순국선열을 포함하여 정부 행사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60년5월 2일에 ‘순국선열유족회’가 비영리법인으로 보사부로부터 인가를 받게 되었으나, 1961년 군사정권에 의하여 유족회는 강제 해산당하게 된다. 이후 1965년 2월 27일 순국선열유족회는 광복회에 강제 통폐합되었다가 1981년에야 비영리 민간단체로 분리되어 다시 법인 설립되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임시정부는 1939년에 ‘순국선열기념일’을 제정하여 기념하였다. 하지만 독립 후에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는 1997년 5월 9일에야 ‘순국선열의 날’을 정부기념일로 제정·공포하였다.


199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된 이후로는 매년 11월 17일 오전 10시 국무총리 주관으로 기념식을 갖고 있으며, 같은 날 오후 2시에는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가 주관하여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순국선열 추모제가 국가기념행사와는 별도로 봉행하는 뜻은 순국선열 15만 여 위 중에서 대다수 순국선열이 후손이 없거나[無後], 무명(無名)으로 순국한 분들이기 때문이니, 임시정부에서 기념일을 정한 이유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순(殉)이라는 글자는 ‘따라 죽는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삶을 국가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소중한 자신의 삶을 조국을 위해 바친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가치이다. 이 소중한 가치가 대한민국을 탄생시켰으니, 순국정신은 바로 ‘대한민국의 정신적 가치요, 이는 민족 정기’이다. 


선열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을 이제 다시는 순국의 희생이 필요 없는 나라로 지켜내는 일은 우리 후손들의 책무이다. 하지만 또다시 조국이 심각한 국난에 직면한다면 무엇으로 대처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선열들의 희생을 기리지 않을 수 없는 준엄하고도 분명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각종 공식적인 의식이나 회의 또는 행사를 할 때 먼저 시각적으로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하고, 그다음 청각적으로 애국가를 제창한 후에, 정신적으로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에 대한 묵념’을 한다. 이 묵념은 국민들이 조국을 되찾고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에게 드리는 최소한의 예의이며, 감사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통해 조국 앞에 목숨을 바치신 분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또다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우리의 기본 자세이기 때문이다.  


필자 최진홍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있으면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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