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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 Theme.1 한국 고대사 연구와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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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역사학에서 고대사의 의의와 모순


‘민족’과 국가 ‘기원’ 놓고 역사인식상 충돌 빚어져

비학술적 견해 지양해야 


글 | 임기환(서울교육대학교 교수) 


근래에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 사이에 역사분쟁이 적지 않은데, 그 분쟁 대상에서 고대사가 결코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시대보다 더 큰 비중으로 분쟁의 중심이 될 때도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당연히 근대 식민지 침략이나 전쟁을 둘러싼 분쟁이 많지만, 한편으로 임나일본부 문제 등 고대사를 둘러싸고 요즘도 종종 역사인식상의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국가 간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식민사학의 피해를 많이 받은 영역이 고대사였으며, 그만큼 반제국주의 민족사학이 주력한 영역 또한 고대사였다. 즉 고대사가 제국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의 주요 충돌 지점이었던 것이다.  


한국 고대사 인식을 둘러싼 충돌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상투적인 문어가 된 E.H. Carr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상기하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런데 ‘고대사도 현대사’라는 말로 바꾸어 놓으면 다소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다. 고대사라면 현대로부터 가장 먼 시대일 뿐만 아니라 사료도 적고 기억의 파편들만 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역사상도 얼마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오늘날과의 시간적 격차도 크기 때문에 역사적인 맥락에서 무언가 매개를 통해 현대사와 간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고대사도 현대사’라는 명제적 선언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자신이 고대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 고대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몇몇 사례를 생각해보면 위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근래에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 사이에 역사분쟁이 적지 않은데, 그 분쟁 대상에서 고대사가 결코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시대보다 더 큰 비중으로 분쟁의 중심이 될 때도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당연히 근대 식민지 침략이나 전쟁을 둘러싼 분쟁이 많지만, 한편으로 임나일본부 문제 등 고대사를 둘러싸고 요즘도 종종 역사인식상의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한국과 중국 사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2003년 이래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사, 발해사 귀속을 둘러싼 역사인식의 충돌이 지금도 여전히 예민하게 남아있다. 예컨대 중국 국가박물관이 올해 7월 26일부터 한중 수교 30돌과 중일 관계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여 한·중·일 세 나라의 고대 청동기 전시회를 열었다. 그런데 중국 국가박물관 측에서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 설명용으로 만들어준 한국 역사 연표에서 고구려, 발해 역사를 제외한 연표를 전시하였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한국 측의 항의가 있자 중국 국가박물관은 한·중·일 역사 연표를 모두 지우는 미봉책으로 넘어갔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한국 역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동북공정’의 입장을 전혀 바꿀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표시한 셈이다. 이는 고구려와 발해 역사의 귀속 문제가 앞으로도 언제든 항상 터져 나올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국가 간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식민사학의 피해를 많이 받은 영역이 고대사였으며, 그만큼 반제국주의 민족사학이 주력한 영역 또한 고대사였다. 즉 고대사가 제국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의 주요 충돌 지점이었던 것이다. 제국주의 역사학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역사적 논거로서 고조선 특히 기자조선 및 한군현의 존재, 그리고 임나일본부 문제에 주력하였고, 민족주의 역사학 역시 식민사학에 대항하면서 마찬가지로 고조선과 한군현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대결 과정에서 엄격한 과학적 방법과 인식이 결여된 주장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지금도 여전히 고조선이나 한군현 문제를 놓고 비역사적이고 비학술적인 견해들이 횡행하는 이른바 ‘상고사 파동’이 1970년대 말 이후 종종 거듭 나타나고 있다. 


상고사 파동을 일으키는 유사역사 주장 측은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의 대결 구도를 가상하지만, 사실 식민사학에 대한 가장 엄격한 비판은 고대사 영역에서 이루어졌으며, 해방 후 한국 고대사 연구가 성취한 주요 성과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상고사 파동’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오늘날 제기되는 다양한 내용과 형태의 민족 내 모순을 은폐하려는 이데올로기가 ‘민족’의 외피를 둘러쓰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이 학술을 통제하려는 그릇된 시도들의 결과란 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근대 국민국가 기원으로서의 고대사


이러한 국내외 사례를 보면 고대사가 단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 역사인식의 주요 충돌 현장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오늘로부터 시간적으로 가장 먼 과거인 고대사에서 왜 이런 갈등과 충돌이 빚어지는 것일까? 이는 근대 역사학에서 고대사가 근대 국민국가들이 지향하는 ‘민족(Nation)’과 국가의 ‘기원’을 다루는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근대 국민국가들은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근대 역사학에 요구하였고, 이를 고대사 영역에서 충실히 수행해 왔던 결과이다. 그래서 고대사는 과학적 인식보다는 근대 민족의 역사적 연원이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침투되는 영역이 되기 십상이었다. 


유럽의 근대 역사에서 등장하는 ‘Nation’은 민족 혹은 국민으로 번역되고 있다. 민족이란 용어는 일본 메이지유신기에 Nation의 번역어로 등장하였지만, 그 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Nation 개념과는 차별적으로 재구성되었으며, 그것이 한국에 수용되었다. 그 뒤에 민족은 근대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강력한 정치적 개념이 되었으며, 민족을 주체로 역사를 다시 기술할 수 있는 개념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해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민족은 일종의 신성성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Nation State)의 성립과 발전, 전개 과정에서 민족(Nation)은 고정불면의 개념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에 따라 변화 재구성되어야 하는 개념이며 실체라고 생각한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민족은 상상된 공동체”라는 연구는 탈민족주의론에 의해 민족이 실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주장의 논거로 사용되곤 하지만, 이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민족이 상상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고와 개념이 상상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사 교과서에서 한국사를 한민족이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과정이며, 한민족이라는 역사공동체, 운명공동체의 역사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한민족이 고조선 때부터 형성되었다는 전제로부터 나온다. 과연 고조선 때에 ‘한민족’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고조선 때의 한민족과 오늘의 한민족은 동일하거나 동질적일까? 또 고조선을 한민족 국가라고 한다면 그 뒤에 나타나는 삼국시대 역사는 한민족의 분열이라는 역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나? 이런 물음에 답은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한국사를 한민족사라고 하여도 결코 ‘한민족’이 균질적이라고 볼 수 없음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한민족의 역사라는 설정 자체가 상상된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이른바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는 한국과 중국의 역사인식 차이는 무엇보다 역사 기술의 주체인 ‘민족’의 개념 차이에 있다. 중국의 민족은 한족(漢族)을 비롯한 56개의 민족이 융합하여 만든 ‘중화민족’으로 이는 현재적 민족 개념이다. 한국에서의 민족은 혈통적·역사적 개념이 중심을 이루지만 이 역시 과거에 실재했던 존재라기보다는 현재에 구성된 민족 개념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과 중국의 민족은 그 접점을 만들기 어려울 만큼 민족 개념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서로 다르게 ‘민족’을 구성한 결과이다. 이렇게 각자의 민족 기념을 기준으로 역사를 구성하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적 범주는 중첩되기 마련이고, 그 역사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경우 의당 ‘역사 충돌’로 현상화될 수밖에 없다.  


‘민족’의 재구성


이렇게 민족 개념이 구성된 결과라는 이해가 Nation(민족)이 실재하지 않는 상상된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근대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공동체는 존재하며 그 공동체를 Nation(민족)이라고 부를 경우 오늘의 현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개념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의 역사학자 이성시는 그의 저작 『만들어진 고대』에서 근대 국민국가 체제라는 컨텍스트에서 동아시아 고대사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대해 탐색하고 있다. 이 저작은 고대 시기에 전개되었던 역사에 대한 실증적 접근이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의 역사적 기원을 구성하는 결과로서의 고대사 인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물론 ‘만들어진 고대’라는 제목은 ‘실재하는 고대’가 따로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역사상이 어떤 맥락에서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환기를 가리킨다. 


근대 역사학의 역할이 Nation(민족)의 역사성을 담보하는 데에 그치지는 않는다. 진보·발전 사관 역시 근대 역사관의 하나로서 해방 후 한국사 연구에서 주요한 성과를 이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연구 동향이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1960년대 이후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여 하나의 연구방법론이자 한국사 인식체계로 정립되었는데, 한국사의 전개 과정을 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발전적으로 체계화하려는 관점이다.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내재적 발전론은 여러 연구 영역에서 나타났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가형성론 내지는 국가발전단계론 연구이다. 1980년 이후 국가형성론이 확대된 배경에는 국가 주도의 근대화 과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요구, 그리고 이와 반대로 독재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고대국가론이 현재에도 중요한 이념적 지형을 갖고 있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이는 한국 고대사 연구가 현실모순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추어 왔음을 시사한다. 


물론 근래에는 이와 같은 민족 주체, 국민국가 단위 중심의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인식과 관점들이 모색되었는데 탈민족주의, 탈식민주의, 탈근대역사학, 트랜스내셔날 역사학, 동아시아론, 글로벌 히스토리 등등이 그것이다. 동시에 최근의 세계적인 차원에서 벌어진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국민국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즉 펜데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차원이나 지역 통합체 단위(대표적으로 EU)는 작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개별 국민국가 단위의 대응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글로벌과 탈민족의 시대라고 운위된 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민국가가 중요한 공동체 단위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국가의 자기 완결성을 최선의 가치로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국민국가 내부를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의 개인과 집단, 지역, 계급과 계층 등이 존재하고 이들 사이에 불평등한 구조는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면모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고대사 연구를 포함하여 역사 연구에서 민족과 국가를 초역사적이며 자기 완결적인 주체로 설정하면서 민족과 국가 내부의 개인과 집단 등을 사상시키는 인식은 의당 비판되어야 한다.


탈민족과 탈국가는 민족과 국가를 해체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그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층위의 공동체와 개인을 민족과 국가와 동일한 위치로 격상시키는 재발견의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현실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의 재구성이 시도되어야 하며, 한국 고대사 연구 역시 그러한 과제에 비판적으로 기여해야 하는 책무가 주어진다.   


필자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 고대사 중에서도 고구려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역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역사 연구와 역사교육만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하는 역사 공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고구려 정치사 연구』(2004, 한나래),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공저)』(2009, 동북아역사재단), 『현장검증 우리역사 (공저)』(2010, 서해문집), 『한국고대사(공저)』(2016, 푸른역사) 외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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