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 Theme.4 식민주의 사학의 잔재, 유사 역사학
페이지 정보
본문
음모론·피해의식의 반지성주의 역사관
식민 지배 정당화 위해 역사 이용한 프로파간다
가장 저급한 정치 선전
글 | 기경량(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압적으로 병합한 이후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역사학을 활용하였다. 이것이 곧 ‘식민주의 사학’이다. 식민주의 사학은 학문의 외피를 쓴 프로파간다였다. 합리적이고 귀납적인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는 정당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정치적 목적과 편견에 따라 만들어진 억지 주장이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식민주의 사학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다. 바로 우리의 고대사가 반도가 아닌 대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주장이다. 고조선의 중심지인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 아닌 만주에 있었다거나, 고조선 멸망 이후 설치된 낙랑군 또한 평양이 아닌 만주에 있었다는 식의 주장이 그것이다.
식민주의 사학, 한국 고대사를 굴절시키다
이 중 ‘일선동조론’은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주장이다. 주로 고대사 연구에서 제기된 주장으로, 악명 높은 임나일본부설과도 연관되어 있다. 고대에 일본과 조선이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으니, 근대에 들어서 두 나라가 다시 합쳐 하나의 나라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정체성론’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던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이론을 활용한 식민주의 사학이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제 사회-근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순서를 차례로 밟아가며 발전한 데 반해, 조선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단계에도 여전히 고대 노예제 사회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역사의 모범생인 일본이 낙제생인 이웃 조선을 도와주기 위함이라는 주장이다.
‘타율성론’ 중에는 ‘반도적 성격론’이 대표적이다. 반도적 성격론은 곧 지리적 결정론에 의거한다. 반도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보았을 때 대륙 세력인 중국과 해양 세력인 일본의 사이에 끼어 있는 피동적인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앞서 언급되었던 임나일본부설은 고대 한반도 남부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타율성론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한국사의 첫 나라인 고조선이 이민족인 위만에 의해 찬탈된 점이나 한나라에 의해 멸망된 이후에 한반도 북부에 낙랑군 등 한군현이 설치된 것도 타율성론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식민주의 사학은 학문의 외피를 쓴 프로파간다였다. 합리적이고 귀납적인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는 정당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정치적 목적과 편견에 따라 만들어진 억지 주장이었다. 목적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식민 지배가 붕괴한 이후에는 그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타율성론, 특히 반도적 성격론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반도적 성격론의 대전제는 반도의 역사가 대륙의 역사나 해양의 역사보다 열등하다는 데 있다. 지리적 조건이 역사 전개에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리적 조건이 역사 전개를 결정하는 요인의 전부는 아니다.
고대 이탈리아 반도에서 건국하여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였던 로마 제국의 사례, 대항해 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전 세계로 뻗어나가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던 스페인의 사례 등을 생각해 보면 반도의 역사가 유독 열등하다거나 피동적이라는 주장은 간단하게 반증·논파된다. 낙랑군 등 한군현이 한반도 북부에 설치된 것을 한국 역사의 타율성의 근거로 삼는 것 또한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이다. 예컨대 영국이나 프랑스 지역도 한때는 고대 로마 제국에 점령되어 속주가 설치된 곳이었다. 로마인들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 지역에 국경선으로 건설한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지금도 남아 있는 유명한 유적이다. 하지만 한때 로마의 점령지였다고 해서 영국이나 프랑스의 역사가 영속적으로 타율성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식민주의 사학의 잔재, 유사 역사학-사이비 역사학

고조선과 낙랑군의 위치를 만주로 설정하려는 시도는 얼핏 반도적 성격론에 대한 의미 있는 반론처럼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반도의 역사는 대륙의 역사보다 열등하다’는 식민주의 사학의 대전제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오류를 내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근대 이후 평양 지역에서 수행된 고고학 조사를 통해 낙랑군과 관련된 유적과 물질 자료가 무수하게 출토되었기 때문에 낙랑군을 평양 외의 지역으로 설정하려는 시도는 실증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반도적 성격론의 독소적 측면은 지리적 결정론의 자의적이고 악의적인 적용이다. 로마와 스페인 등 실제 역사의 반증 사례 몇 개만으로 간단히 논파할 수 있다. 반도적 성격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조선의 중심지를 만주 지역으로 무리하여 설정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대륙에 대한 비합리적인 집착과 강박이야말로 반도의 역사를 폄하하는 시각에 기반한 식민주의 사학의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를 만주로 설정하는 것은 고고학 발굴 자료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고, 문헌 기록에 대한 면밀한 교차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과거에는 하나의 가설로 제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충분한 학문적 검토가 이루어지고, 압도적인 양의 물질 증거가 갖추어진 지금에 와서도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사고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것과 같다.

유사 역사학과 사이비 역사학 용어는 가짜 역사를 의미하는 ‘슈도 히스토리(pseudo history)’의 번역어이다. 따라서 어느 쪽을 사용하여도 상관없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유사 역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자. 유사 역사학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며, 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대단히 많다. 일본에서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바다를 건너 몽골로 가서 칭기즈칸이 되었다든지, 예수가 못 박힌 골고다 언덕의 위치가 사실은 영국의 브리튼 섬이라든지, 일본인과 유대인의 조상이 같다든지, 아틀란티스 대륙은 실존하였는데 역사학자들이 감추고 있다든지 하는 주장들이 떠돈다. 모두 비과학적·비실증적이며 학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괴설들이다.
안타까운 점은 ‘반도 사관’의 극복을 전면에 내세우는 유사 역사학 신봉자들의 주장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식민주의 사학의 잔재라는 점이다. 이들은 일제가 ‘대륙에서 전개되었던 한국사’를 반도로 축소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식민주의 사학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하는 이야기다. 식민주의 사학의 본질은 일본의 침략을 지원하고 정당화하는 데 있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일선동조론’을 고안하였던 것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침략 대상을 아시아 전체로 확장하면서 만선사에 몽골과 시베리아까지 포함시킨 ‘만몽사(滿蒙史)’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전체를 시야에 넣은 ‘동아사(東亞史)’도 만들어냈다. 또한 일본의 극우 정치인과 군부 출신이 주축이 되어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하고, 만주·조선·일본은 대륙에서 출발한 천손 민족의 후예라고 주장하였다. 또 우랄 산맥과 알타이 산맥 사이의 투란 평원에서 발원한 민족 집단을 상정한 투란주의(Turanism)에 입각해서 ‘일본·조선·만주·몽골 동조론’까지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식민주의 사학은 한국의 역사를 반도로 축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만주를 비롯해 아시아 전역과 연결 지으려고 하였다. 그것이 일제의 영토 팽창과 침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학문의 성격을 결여한 정치 선전에 불과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유사 역사학의 뿌리이다. 유사 역사학 신봉자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관의 근간은 이처럼 학문적으로도 가장 저급한 레벨의 식민주의 사학이었던 것이다.
‘민족사학’을 참칭하는 유사 역사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광복 이후 ‘민족사학’을 내세우며 유사 역사학을 주장하거나 퍼트리는 활동을 주도하였던 핵심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친일 경력을 가지고 있거나 극우 파시스트로 규정할 수 있는 자들이다. 친일 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의학박사 최동, 일제 시기에 조선총독부 농림국 및 황해도 은율군수 직을 지내는 등 고위 관료로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역시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문정창, 일제 시기에 나치 치하의 독일로 유학을 하여 철학 공부를 하고 이승만 정권하에서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며 독재를 비호하는 일민주의의 형성에 기여하였던 안호상, 일제 시기 만주군 간도 특설대 출신으로 광복 이후 5·16 군사 쿠데타에 가담하기도 하였던 군인 박창암,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을 ‘민족지도자’로 찬양하고 가짜 역사서인 『환단고기』를 번역하여 세상에 퍼트린 임승국 등이 대표적이다.
유사 역사학 신봉자들은 스스로 ‘민족주의 사학’의 계승자임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본질은 일제 시기 식민주의 사학이 주창하였던 ‘대동아 공영권’의 역사관에서 일본의 자리에 한국을 슬쩍 갖다 놓은 것에 불과하다. 민족사학이라는 이름을 참칭하면서 행하는 것이 고작 열화된 식민주의 사학의 아류라는 점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사 역사학 신봉자들은 자신들의 세를 불리고, 활동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독립운동가 유족 단체 등을 끌어들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민족사학의 계승자’라는 허명에 속아 유사 역사학을 수용하거나 호감을 가지게 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있다면,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는지 깊이 생각할 일이다.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고구려 왕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대사의 공간적 이해와 역사 인식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왕도·도성의 구조와 형태에 대해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식민주의 사학의 잔재이자, 반지성주의의 산물인 쇼비니즘 사이비 역사학에 대한 비판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